루이 9세
- 최초 등록일
- 2019.08.30
- 최종 저작일
-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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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본론
1. 루이 9세의 즉위과정과 초기통치
2. 루이 9세 시기의 사회
3. 제 7차, 8차 십자군 전쟁
4. 샹트 샤벨 성당
Ⅱ. 책소개
1. 『이야기 프랑스사』
2. 『프랑스 문화와 예술』
Ⅲ. 결론 (소감문)
Ⅳ. 참고문헌 목록
본문내용
ⅰ. 루이 9세의 즉위과정과 초기통치
루이 9세는 3년간의 짧은 치세를 뒤로 한 채 사망한 루이 8세와 카스티야 공주 블랑슈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었다. 첫째 아들 필리프는 1209년에 태어났으나 루이 9세가 네 살 되던 1218년 사망했고 그 뒤에 태어난 알퐁스와 장 쌍둥이 형제는 태어나자마자 얼마 후 사망했다.
그가 9살 되던 해에 조부인 필리프 2세가 사망했고, 12살이 되던 해인 1226년 11월 8일 부왕 루이 8세가 남부 프랑스 원정 도중 사망했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사망하게 되자 세자 루이 9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너무 어려 모후 블랑슈가 섭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갑작스러운 왕의 서거와 어린 왕의 즉위로 인해 정국이 불안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축성식은 가능한 한 가장 빠른 날짜인 11월 29일에 거행되었다. 하지만 1227년에서 1228년까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왕과 외국인 왕비가 주도하는 왕정은 이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더군다나 이 반란에는 숙부인 필리프 위르펠은 물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까지 개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블랑슈의 선처로 감옥에서 풀려난 플랑드르 백작 페랑과 루이 8세 이후 관계 개선이 이루어진 샹파뉴 백작 티보 4세의 도움으로 루이 9세와 블랑슈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230~31년 동안에는 역으로 루이 9세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이 반란군들을 진압해 나갔다. 아직 17살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군대를 지휘하는 루이 9세의 모습과 모후 블랑슈의 정치력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던 많은 봉건 귀족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이들은 점차 루이 9세와 블랑슈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1234년 20세가 된 루이 9세는 프로방스 백작 레몽-베랑제 4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로부터 루이 9세의 권위는 별 탈 없이 프랑스 전역에 걸쳐 인정받았고 더 이상 그에 대한 봉건 귀족들의 도전이 발생하지 않는 듯 보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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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존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111p~119p
마이클 우드 외 3인,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마로니에북스(2009)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89~96p
박혜숙, 『프랑스 문화와 예술』, 연세대학교 출반부(2010), 335~339
송양현(2008), “제 7차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재조명 – 33p
송양현(2008), “제 8차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재조명 – 34p
루이 9세 초상·벵센의 소나무 아래 정의의 여신을 방문한 성 루이’,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카페왕조 계보·장미창·샤를’, 『두산백과』
첨두아치·리브볼트·부벽’, 『건축설계대사전』
이집트로 떠나는 루이와 십자군, <조반니 비라니의 〈연대기〉 사본의 그림, 로마 바티칸 도서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