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면모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즉위 후인 1392년 8월 13일에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으며, 일시 중지되었던 천도계획은 태조 2년 권중화가 왕실의 태실지를 살피고 돌아와 계룡산 도읍도를 헌상함으로써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의 권위자였던 하륜이 계룡산 도읍지가 불가하다 말하며 신도 후보지로 안산(무악) 남쪽 일대를 지목하였으나, 태조는 이를 따르지 않고 북악산 남쪽 고려시대 남경 궁궐터를 다시 살피고 여러 중신들의 의견을 모아 한양을 신도의 후보지로 정하고, 개경으로 돌아가 한양천도를 결정하게 된다. 즉 태조는 1392년 8월 정승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식 결정하였으며 9월 초에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건설공사를 급속히 추진하게 되었지만 천도는 한양의 모든 건설 사업이 완료되기 전에 미리 실현되었다. 이후 10월 25일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고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여 옛 한양부 객사를 임시 왕궁으로 삼아 거처하다가 1395년 9월 종묘와 경복궁이 완공되어 12월에 왕이 신궁에 입어하게 되었다. 15세기 초 한성부 인구는 약 10만 명 선이었으며, 대부분 귀족관료와 그 가족들, 군역에 종사하는 군인, 각종 관청에서 사역되는 관노비와 가내 사노비들로 구성되었고 관할구역은 도성 안과 성 밖 10리(성저10리) 지역이었으며, 대체로 동쪽은 우이천과 중랑천까지 남쪽은 한강변과 용산에 이르렀으며, 서쪽은 양화진과 망원정을 지나 덕수원까지, 북쪽은 북한산으로 하였다. 그러다 2세기 후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 등의 재난이 있었으며 인구 또한 3만 9천명 선까지 줄기도 하였는데, 이후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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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장충단비(忠壇碑, 1호), 봉황각(鳳凰閣, 2호), 낙성대(落星垈, 4호),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5호), 용양봉저정(龍鳳亭, 6호), 성제묘(聖帝廟, 7호), 사육신묘(死六臣墓, 8호), 종친부(宗親府, 9호), 천정(天井, 10호), 지덕사 부 묘소(至德祠 附 墓所, 11호), 청권사 부 묘소(淸權祠 附 墓所, 12호), 동십자각(東十字閣, 제13호),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14호), 선농단(先農壇, 15호), 삼군부 청헌당(三軍府 淸憲堂, 16호),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 17호), 수표교(水標橋, 18호), 흥화문(興化門, 19호), 숭정전(崇政殿, 20호), 무계정사(武溪精舍, 22호), 대원군 별장(大院君 別莊) 석파정 사랑(石坡亭 舍廊, 23호), 황학정(黃鶴亭, 25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24호), 석파정(石坡亭, 26호), 한글고비(한글古碑, 27호), 선희궁지(宣禧宮址, 32호), 도선사 석불(道詵寺 石佛, 34호), 서울 성공회성당(聖公會聖堂, 35호), 천도교 중앙교당(天道敎 中央敎堂, 36호),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武堂, 37호), 검암기적비(黔巖紀蹟碑, 38호), 화산군신도비(花山君神道碑, 41호), 세종대왕신도비(世宗大王 神道碑, 42호), 연령군신도비(延齡君 神道碑, 43호), 상봉동 오층석탑(上鳳洞 五層石塔, 44호), 상봉동 석제태실신석(上鳳洞 石製胎室身石, 45호), 광평대군묘역 일원(廣平大君墓域 一圓, 48호), 번사창(飜沙廠, 51호), 중명전(重明殿, 53호), 어정(御井, 56호), 충헌김공신도비(忠憲金公神道碑, 59호), 봉은사 선불당(奉恩寺 選佛堂, 64호), 화계사 대웅전(華溪寺 大雄殿, 65호), 봉원사 대웅전(奉元寺 大雄殿, 68호)
5. 사라진 문화재
국사당, 봉수대, 녹천정, 청학동, 균역청터, 영희전터, 장충단공원, 남소영, 태평관, 전환국, 선혜청, 혜민서, 훈련원, 군기시, 덕안궁터, 저경궁터, 부녀시장, 낙천정터, 전관원터, 독서당터, 동빙고, 동활인서터, 경기감영터, 연희궁터, 망원정터, 군자감터, 새남터, 한강진, 제천정터, 삼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