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와 일본의 신라 협공계획과 무산
- 최초 등록일
- 1999.02.10
- 최종 저작일
- 199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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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I. 渤海 文王 및 新羅 景德王의 對外 政策
II. 渤海와 日本의 新羅 挾攻 計劃
III. 兩國의 新羅 挾攻計劃 霧散
맺음말
본문내용
신라와 발해가 한 역사시대를 이루었던 남북국시대는 교섭과 대립이라는 시각에서 대체로 다섯 시기로 나눈다. 제1기는 발해가 건국하여 기초를 다지던 15년간의 남북 우호기(698-713). 제2기는 발해의 고구려 고토 회복 및 왕권 확립기에 있었던 70여년간의 남북 대립기(713-785). 제3기는 발해 왕권 동요와 신라 귀족 항쟁기에 있었던 30여년 간의 남북 교섭기(785-818). 제4기는 발해의 영토 확장과 신라와 당의 밀착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발해 중흥기의 남북 대립기(818-905). 제5기는 거란의 부흥과 당의 멸망, 그리고 신라의 후삼국 분열로 이어지면서 형성된 발해 멸망기의 남북 교섭기(906-926)가 그것이다. 이렇다면, 남북국은 교섭(68년)보다 대립적인 관계(약159년)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와 발해가 처음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던 것은 신라의 축성사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즉, 聖德王 12년(713)에 신라가 開城을 쌓았다는 기록부터가 아닌가 한다. ) 이어서 양국간의 무력적 대립관계는 聖德王 20년(721) 7월에 何瑟羅道(江陵)의 壯丁 2천을 징발하여 (黃海道, 鳳山), 漢城(黃海道, 載寧), 獐塞(黃海道, 遂安), 池城(黃海道, 海州), 德谷(黃海道, 谷山)등에 6성을 쌓았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인정할 만 하다.
본고에서는 이 계획이 전개되기 전, 발해와 신라의 정치·외교적인 사정과 일본이 이 계획에 발해를 끌어 들었던 증거들을 밝히려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