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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宗妃 純明孝皇后의 생애와 裕陵 연구 (A Life of Empress Sunmyeong, the First Wife of Emperor Sunjong, and the Construction of Yugangweon and Yur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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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5.16 최종저작일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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純宗妃 純明孝皇后의 생애와 裕陵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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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사)한국인물사연구회
    · 수록지 정보 : 한국인물사연구 / 12호 / 183 ~ 227페이지
    · 저자명 : 장경희

    초록

    純明孝皇后 민씨는 11세 되던 1882년 明成皇后에 의해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1904년 10월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1894년부터 1904년까지 10년간 세자(뒤의 순종)의 사부였던 韋觀 金商悳에게 보낸 편지 10통을 통해 그녀가 시세의 흐름에 민감하고, 정사에 대한 식견이 명확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궁궐에 들어온 이후 명성황후에 의존해 살았으나 황후의 사후에는 마땅히 의지할 상대가 없어 평소 세자의 사부로 왕래가 잦았던 위관을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다.주고받은 편지가 주로 기울어져 가는 왕조를 걱정한 나머지 위관이 출사하여 고종황제를 돕도록 부탁한 것이지만 편지의 애절한 문투와 행간에는 그에 대한 정감도 서려있었다. 이처럼 그녀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병약하고 명성황후의 그늘에 숨어 있던 가녀린 왕실의 여인이 아니라, 세상 사정과 조정의 인사 문제까지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외세의 침탈로 국가의 위기가 눈앞에 다가 온 대한제국의 황태자비로서의 당당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1904년, 순명황태자비가 죽어 조성한 裕康園은 대한제국의 유일한 황태자비 墓制이다. 이 유강원을 고종황제는 자신이 壽陵으로 정한 금곡의 홍릉이 완공된 뒤에는 황제릉으로 조성할 의도를 갖고 착수한 듯하다. 그것은 유강원을 조성할 때 황릉에만 세우는 침전을 비롯하여 당가 등과 같은 각종 의장·의물들이 1897년에 조성한 명성황후의 청량리 洪陵을 전례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금곡 홍릉에 황제릉을 조성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처럼 유강원도 마찬가지였다. 고종황제는 1900년부터 금곡 홍릉에 寢殿을 비롯한 각종 전각이나 능상 석물은 세워 두었으며, 침전 앞 석물도 이미 1899년에 제작을 끝내고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을 천장한 후 설치하려다가 못하고 자신이 죽어서야 완성되었듯이 고종황제가 1904년에 조성한 유강원의 침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과 석물도 1926년 순종효황제의 사후 금곡 유릉으로 옮겨졌다. 현재 유릉에 세워져 있는 침전·비각·재실 등의 건물과 침전 내부에 설치한 唐家를 비롯한 의장·의물, 그리고 능상에 설치된 엄전석·혼유석·망주석 등의 석물들은 모두 이때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러한 의물들은 순명황태자비를 더없이 아꼈던 고종황제가 정성껏 제작하였기 때문에, 금곡의 유릉에 옮겨다 사용해도 손색이 없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금곡 홍릉에 조영한 황제릉의 형식은 침전 앞에 석인과 석수가 일렬로 쭉 늘어서는 형식이었으나 이것을 생전에 결국 세우지 못한 아쉬움이 남듯이, 금곡 유릉의 침전 앞에 세워진 석물들도 결국 1927년 일본인의 손에 의해 식민지 양식으로 조성된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종황제에 의해 시도되었던 대한제국의 황제릉 양식은 금곡 홍릉에서는 실현되었고, 순명황후와 순종황제의 금곡 유릉에서는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셈이 되고 말았다.

    영어초록

    Empress Sunmyeong[純明孝皇后] of the Yeoheung Min clan was invested by Empress Myeongseong[明成皇后] as the Crown Princess at the age of 11 in 1882, and died young at the age of 33 in December 1904. 10 letters sent to Kim Sang-deok[金商悳], the teacher of the then Crown Prince Sunjong[純宗], for 10 years from 1894 to 1904 obviously indicate that she had a considerable insight into history and a correct understanding of the Royal situation. Since she had entered the palace, she had Empress Myeongseong to turn to. After the Empress died, she kept up correspondence with Kim Sang-deok, and even recommended him to enter government service to assist Emperor Gojong[高宗]. She was not a feeble Royal lady who would hide herself under the protection of Empress Myeongseong, and she knew well about the ways of the world and fully understood the personnel-related matters in the Royal court. She maintained a dignified profile as a Crown Princess of Korea at the time when the national prestige was on the decline due to its relations with neighboring countries.
    Yugangweon[裕康園], the unique tomb of Crown Princess in Korea, was built in 1904 after her death. In those days, Emperor Gojong seemed to intend to raise the status of Yugangweon to the tomb of Emperor at the time when the construction of Hongneung[洪陵], the tomb for himself and Empress Myeongseong, would be completed in Geumgok[金谷]. His intention was evident in buildings, decorative structures and stone sculptures which were modelled on those of Hongneung, the tomb of Empress Myeongseong, that had been built in Cheongnyangni in 1897. Yugangweon, however, had no chance of becoming the tomb of Emperor, as Emperor Gojong failed to finish Hongneung, the tomb of Emperor in Geumgok, during his lifetime, despite that its stone figures had been ready to be placed in front of the tomb chamber in 1899, and its buildings and stone structures had been built on the tomb in 1900. Emperor Gojong missed to complete the tomb of Emperor by waiting for a timely relocation of the tomb of Empress Myeongseong. The decorative structures and stone figures of Yugangweon were comparable to those for a tomb of Emperor, and were later relocated to Yureung[裕陵] that was posthumously built for Emperor Sungjong in Geumgok.
    Although it was not finished, Hongneung, the tomb of Emperor in Geumgok, was designed to place the stone statues of human and animal figures lined up in front of the tomb chamber. Those of Yureung in Geumgok also followed the same layout, but were forcedly produced in Japanese colonial pattern after Emperor Sunjong died in 1927. The layout pattern what Emperor Gojong intended for the tomb of Emperor was only accomplished in Hongneung, the tomb of Emperor Gojong and Empress Myeongseong, and counted half a success in Yureung, the tomb of Emperor Sunjong and Empress Sunmyeong.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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