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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勒의 생애와 활동 - 정치적 측면을 중심으로 - (Uruk's Life and Activities - Focused on political aspects -)

3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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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4.25 최종저작일 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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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勒의 생애와 활동 - 정치적 측면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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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수록지 정보 : 민족문화논총 / 42호 / 265 ~ 301페이지
    · 저자명 : 정동락

    초록

    于勒은 490년대 무렵 대가야의 省熱縣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성열현은 정치ㆍ문화적으로 앞선 지역이었으며, 대가야의 왕명이 직접 관철되는 곳이었다. 우륵은 성열현의 문화적 특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그 후 520년대 초반경 嘉實(悉)王의 부름을 받고 대가야의 都城으로 入京하게 된다. 우륵을 소환한 가실왕은 아마도 522년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은 異惱王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5세기 후반 대가야는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고, 이를 배경으로 오늘날 전라도 일원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권역을 아우르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6세기에 들어와 섬진강 유역에 대한 백제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대가야권 세력들이 잠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실왕은 유교적인 禮樂사상을 바탕으로 한 대가야권 통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내적으로 정치개혁과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백제의 東進에 대응하여 신라와의 동맹을 추진하였다. 가실왕은 개혁 추진을 위해 성열현 출신의 우륵을 전격 발탁하였다. 이는 자신을 지지할 세력으로 기왕의 정치세력이 아니라, 우륵으로 대표되는 성열현 세력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우륵은 가실왕의 이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야금 12곡을 작곡하였다. 그 시기는 520년대 전반이었을 것이다.
    가실왕의 개혁은 내부세력의 반발과 신라의 영토확장 욕구 등과 맞물려 529년 결혼동맹이 파기됨으로서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더하여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으로 신라의 공세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대가야의 정국도 급속히 냉각되어 친신라파가 몰락하고, 친백제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아마도 그 언저리 즈음에 가실왕이 사망하고 친백제파의 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던 듯하다. 이에 우륵은 가야금을 품에 안고 신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 시기는 540년대 후반 경으로 짐작된다.
    신라로 망명한 우륵의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는 삼국의 대치가 극심했던 변방의 국경지대였던 충주로 安置되었다. 충주에서 우륵은 가야금을 통해 진흥왕의 주목을 끌었지만, 다시 경주로 들어가 최고지배층으로 편입되지는 못하였다. 대신, 그의 신라인 제자들에 의해 신라적으로 변용된 가야금곡이 신라 大樂으로 정착되었다. 우륵의 정치적인 망명은 성공적이지 못하였지만, 음악가로서의 선택은 어느 정도 성공했던 셈이다.
    한편, 우륵의 망명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출신지인 성열현 세력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던 듯하다. 성열현은 지리적으로 국경 요충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王都의 직할현과 유사한 성격으로 편제되었던 듯하다. 이곳은 신라와의 접경지대로 양국의 대립 충돌이 빈번하였지만, 신라문화의 영향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곳이었다. 우륵의 망명은 성열현의 이탈로 이어졌고,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당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영어초록

    Uruk was born in Seongyeol-hyeon, Daegaya around the 490s. At that time, Seongyeol-hyeon was a politically and culturally advanced place where Daegaya king’s order was directly carried out. Uruk improved his ability based on the cultural properties of Seongyeol-hyeon. Later, He came up to the capital city in Daegaya by the order of King Gasil in the early 520s. King Gasil who called Uruk was possibly King Inei who concluded a marriage alliance with Silla in 522.
    Daegaya accomplished the rapid growth in the late 5 century, and based on it, it developed into a country that occupied wide-spread territory to the whole area of today’s Jeolla Province. However, as Baegje’s offensive was intensified, Daegaya’s sphere of influence weakened. In such a situation, King Gasil pursued incorporation policy based on Confucian Ye-Ak(禮樂) thoughts. Therefore, he pursued policy reforms and strong royal authority domestically and abroad promoted an alliance with Silla to cope with Baegje. King Gasil selected Uruk of Seougyeol-hyeon birth, which means that he selected Seongyeol-hyeon power represented by Uruk for his supporters, not the past political forces. Uruk composed twelve pieces of Gayagum to support King Gasil’s ideology when it was around the early 520s.
    King Gasil’s reforms lost its motive due to opposition of the inside power and Silla’s desire for territorial expansion by canceling a marriage alliance in 529. In addition, the fall of GeumgwanGaya in 532 made Silla’s offensive more intensified. The political situation of Daegaya cooled down so rapidly that the pro-Silla group collapsed and the pro-Baegje group took the initiative. Around the period, King Gasil possibly died and the offensive of the pro-Baegje group was more intensified. Therefore, Uruk could not but come to Silla as an exile with his Gayagum, and the period seemed to be in the late 540s.
    Uruk who took refuge in Silla didn’t live smoothly, and he was enshrined in Chungju that was a border area of edges of severe confrontation of the Three States. He attracted King Jinheung’s attraction in Chungju through Gayagum, but he failed to be included in top elites as returning to Gyeonju. Instead, Gayagum pieces were positioned as Silla Dae-ak(大樂) with Silla style modification by his disciples. Uruk's political asylum wasn’t very successful, but his choice as a musician was a success to some extent.
    Meanwhile, Uruk’s exile seemed to be made with the connection with Seongyeol-hyeon power, his birth place. Since Saengyeol-hyeon was geographically located in the key point of the border, it seemed to be formed like the property of Jikhalhyeon(直轄縣) of the capital. This place was the Silla’s border where both countries conflicted with each other often, but in turn it could be easily affected by Silla culture. Uruk’s exile was connected to the withdrawal from Seongyeol-hyeon, and it is considered as the cause of the fall of Daegaya by Silla.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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