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글쓰기 2.1 업데이트
  • AI글쓰기 2.1 업데이트
  • AI글쓰기 2.1 업데이트
  • AI글쓰기 2.1 업데이트
PARTNER
검증된 파트너 제휴사 자료

사이토 슈이치로(齋藤修一郎)의 조선 파견과 활동 (Shuichiro Saito(齋藤修一郎)’s dispatches and activities in Joseon)

44 페이지
기타파일
최초등록일 2025.04.16 최종저작일 2019.06
44P 미리보기
사이토 슈이치로(齋藤修一郎)의 조선 파견과 활동
  • 미리보기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사연구회
    · 수록지 정보 : 한국사연구 / 185호 / 39 ~ 82페이지
    · 저자명 : 박한민

    초록

    이 글에서는 1882년 임오군란 시기부터 시작하여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할 때까지 조선 문제에 관여했던 사이토 슈이치로를 다루었다. 그는 유년시절에 윌리엄 그리피스에게 영어를 배웠고, 미국에 건너가 보스턴 대학에서 법학사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난 후에는 외무성에 들어가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관직생활 중에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비서관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깊은 신임을 얻었다. 사이토는 조선 문제에도 관여했다. 임오군란이 발발한 이후 사이토는 이노우에를 수행하여 시모노세키로 출장을 나갔으며, 수신사 박영효를 도쿄에서 만나기도 했다. 1883년에는 미국공사 푸트의 개인비서로 채용되어 처음으로 조선에 왔다. 이때 그와 조선으로 같이 들어와 통역을 담당한 자가 윤치호였다. 조선에서 체류한 기간은 3개월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사이토는 국왕을 비롯하여 김옥균, 민영익 등 조선 정계에서 요직에 있는 인물들과 빈번하게 만나며 많은 기밀정보를 취득했다. 이것을 이노우에에게 서한으로 수 차례 보고했다. 사이토의 비선 보고와 정책 건의는 이노우에가 조선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정보로 활용되었다. 귀국한 이후로도 사이토는 조선인 망명자들의 동향 파악, 2차 조러밀약 발생 후 일본의 정책노선 변경, 견직물 수출입 등 조선문제에 계속 관여했다. 1894년 10월 그는 갑오개혁이 한창 추진되고 있던 조선에 다시 건너왔다. 12월 17일부터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이 되었다. 그는 내무대신 박영효 아래에서 지방제도 개혁 추진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가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고문관들을 대표하여 요구한 사항은 고문관 규정으로 반영되었다. 이것은 향후 조선에서 전개될 고문정치의 초석을 제도적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고문관 재직 중 사이토는 박영효와 빈번하게 만나면서 이노우에 공사의 의중에 맞게 그가 움직일 수 있도록 배후에서 정치적으로 공작활동을 벌였다. 공사가 부재중일 때는 스기무라 후카시가 그와 상의하여 업무를 처리할 정도로, 이노우에가 신뢰하면서 업무를 맡기는 심복이었다. 하지만 이노우에의 비서이자 막료 이상으로 성장해서 조선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외무성 내 요직으로는 올라서지 못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이노우에가 현직에 있는 동안에만 활용되었다. 사이토는 그의 대조선 정책 추진을 충실히 뒷받침해 준 핵심참모이자 관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영어초록

    The article deals with Shuichiro Saito, who was involved in Joseon problems from the period of the Imo Incident(1882) to the Eulmi Incident(1895). He learned English from William Elliot Griffis as a child, moved to the United States and earned a law degree at Boston University. After returning from U.S., he entered Gaimusho(外務省) and began his career as a bureaucrat. During his career in Meiji government, he gained deep trust after long serving as a secretary to Kaoru Inoue(井上馨). Saito was also involved in Joseon problems. It was only after the outbreak of the Imo Incident that he began to establish ties with Joseon. He accompanied Inoue on a business trip to Shimonoseki, and met Park Young-hyo(朴泳孝) when he visited Tokyo as Susinsa(修信使). In 1883, he was hired as a personal assistant to the U.S. minister Lucius H. Foote, and came to Joseon for the first time. It was Yun Chi-ho(尹致昊) who came to Joseon with him and handled the translation. The period of stay in Joseon was only about three months. Saito frequently met with key persons in Joseon’s political circles, including the king Gojong, Kim Ok-kyun(金玉均), and Min Young-ik(閔泳翊), and acquired a lot of classified information. It has been reported several times in letters to Inoue. Saito’s secret reporting and policy suggestions were used as key information in Inoue’s process of drafting Joseon policy and pushing forward it. Even after returning to Japan, Saito continued to engage in Joseon issues, such as watching current situation of Korean refugees, changing Japan’s policy after the attempt of the second secret treaty between Joseon and Russia, and importing silk goods. In October 1894, Saito moved back to Joseon, where the Gabo Reform(甲午改革) was in full swing. Since Dec. 17, he has become an administration adviser(內部顧問官) in the Joseon government. He was deeply involved in the reorganization of the local system under Park who was the minister of administration. His demands on behalf of the advisors at the audience of the King were reflected in the Advisor’s Regulation. This was an institutional framework for political engagement of Japanese advisors in Joseon. While serving as an advisor, Saito frequently met with Park and engaged in political maneuver behind the scenes to help him move in line with Inoue’s intentions. Inoue trusted Saito so much that during the Japanese minister’s own absence, Fukashi Sugimura(杉村濬) consulted with Saito to handle the work. However, he was not able to be promoted no more than Inoue’s secretary and could not hold a key post in the Gaimusho. His outstanding talent could be used only while Inoue was in office. Saito can be said to have been a key aide and bureaucrat who faithfully supported Inoue’s policy towards Joseon.

    참고자료

    · 없음
  • 자주묻는질문의 답변을 확인해 주세요

    해피캠퍼스 FAQ 더보기

    꼭 알아주세요

    • 자료의 정보 및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해피캠퍼스는 보증하지 않으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자료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 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의 저작권침해 신고센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 다른 자료와 70% 이상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 (중복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필요함) 인터넷의 다른 사이트, 연구기관, 학교, 서적 등의 자료를 도용한 경우 자료의 설명과 실제 자료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
  • 전문가요청 배너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5년 10월 19일 일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4:08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