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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민족주의세력의 자치운동의 전개 양상 (Self-Governing Movement of Korean Nationalist Groups in the 1920s)

4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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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3.28 최종저작일 2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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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민족주의세력의 자치운동의 전개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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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민족운동사학회
    · 수록지 정보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92호 / 89 ~ 130페이지
    · 저자명 : 조규태

    초록

    이 글은 1920년대 민족주의세력의 자치운동의 전개 양상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먼저 민족주의세력의 자치론 확산과 민족적 중심세력의 형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연정회에 참여한 인물들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연정회의 결성 배경을 추론해보았다. 다음으로는 1925년 보통선거법의 통과 이후 자치운동세력의 농민기관 조직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민족주의 우파의 결속과 민족주의 좌파의 분립 배경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신간회의 결성 배경을 알아보려 하였다.
    3ㆍ1운동 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정책의 하나로 조선의 자치에 대한 방안을 검토하자 조선의 민족주의계 인사 중에서도 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인사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동아일보』 등에 자치의 필요성, 해외에서의 자치운동 등에 대한 기사를 심심치 않게 게재하였다.
    그런데 1923년 중후반 사회주의세력이 부상하고, 문화운동이 한계에 부딪히며, 임시정부를 변혁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족주의세력은 민족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로서 일본 정부로부터 행정 자치권을 얻기 위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민족주의세력은 1923년 9월 자치운동의 추진체로서 연정회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처음 이에 참여한 세력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언론계, 천도교계ㆍ감리교계(이승만세력)ㆍ장로교계(안창호세력)의 종교계였다. 기독교와 천도교, 일본 유학생, 교육기관의 운영자와 교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관계자, 자본가 계급이 다수인 연정회의 참여자들은 대체로 자유주의사상과 문화주의적 사회변혁관을 가졌다.
    이런 점에서 연정회의 구성원들이 조선의 자치를 주장하거나, 일본이 제시한 자치를 받아들였던 것은 ‘일본에 대한 타협 여부’가 고려의 주된 요소가 아니라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체제를 구현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 중요한 판단의 준거였다. 요컨대 그들이 지향하는 자유주의체제가 구현될 수만 있다면 그들은 굳이 투쟁과 혁명으로 큰 희생을 치르지 않는 길을 택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소위 자치운동이었다. 그런데 자치파들이 일본의 自治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식민지 조선이 영국-미국-일본 등으로 구성된 자유주의체제에 편입되고,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대륙세력이 아니라 해양세력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연정회에 참여한 집단 중 천도교는 자치의 실현에 대비하여 1923년 천도교청년회를 천도교청년당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장로교에서는 1923~24년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의 합동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민족주의세력의 연정회 조직에 대하여 사회주의세력은 체제 프레임이 아닌 민족 프레임으로 공격하였다. 즉,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은 연정회가 조선총독부와의 협의 하에 진행된 타협적 민족운동이라고 비판하였고, 연정회 참여자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민족적 경륜」을 문제삼아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4년 연정회의 조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런데 1925년 일본에서 보통선거법이 통과된 직후 일본에서 조선에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소문이 놀자, 민족주의자들은 자치가 주어지고, 보통선거에 의해 자치정부가 만들어질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러자 자치운동에 참여한 각 그룹의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주의세력의 연합적 자치운동단체를 조직하려고 하면서도 그룹별로 자치의 구현에 대비한 그룹별 유사 정치조직을 정비하거나 강화하였다. 또 보통선거가 실시된다면, 인구의 80% 이상인 농민을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조선농민사ㆍ농촌부ㆍ협동조합운동사와 같은 농민기관과 농민부서를 조직하였다.
    이 과정에서 계열 내에서의 경쟁과 분화가 발생하였다. 언론계에서는 조선일보계 인사들이 이탈하였고, 천도교에서는 구파가 이탈하여 신ㆍ구파의 분화가 발생하였다. 또 동화형 자치운동세력인 유민회의 인사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자들과 천도교 구파의 교인 및 조선일보사의 기자들은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6ㆍ10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타협성 혹은 비민족성을 문제 삼아 자치운동세력을 공격함으로써 민족주의계 자치운동세력의 분열과 약화를 유도하였다.
    안창호세력은 이광수를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하도록 하고 중국에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감리교의 이승만세력도 제한적으로 참여하였다. “자치가 실현되더라도 친미세력인 자신들에게 권력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이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일본에서 유학하여 일본인과의 정치적 인맥이 두터웠던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송진우, 천도교의 최린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계의 인사들과 접촉하여 일본이 조선에 자치를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꿈에 불과하였다. 일본은 끝내 조선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민족주의계의 자치운동세력은 그들이 뜻하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이 자치파들의 역량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들 뒤에는 사제관계로 맺어진 수만명의 학생과 믿음으로 맺어진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세력들이 민족주의계의 자치운동세력(분리형 자치운동세력)을 강하게 비판하여 공격하고, 또한 민족주의 좌파와 연계하여 신간회를 결성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영어초록

    This article explores the development of the self-governing movement of Korean nationalist groups in the 1920s. First, I made a close study about the spread of self-governing theory by nationalists and the formation of nationalists inner circle, from 1920 to 1924. In this chapter, I examined the backgrounds of the formation of Research Association of Politics(Yeon- chung-hoe) and the characteristics of that members. Second, I looked at the self-governing movement of Korean nationalist groups from 1925 to 1927, when the realization of self-governing and choosing government through general election were anticipated With the slump of national cultural movement and the float of social movement of socialists, and the rupture of the council of the representatives in Sanghai, nationalists erected Research Association of Politics(Yeon-chung- hoe) to carry forward the self-governing movement. The members of the association were composed of media group of the Donga Ilbo and the Chosun Ilbo, religious of Christianity, Cheondogyo, education group, and ect. And they are liberalists and culturalists, spiritualists, and those who have studied in Japan. They wanted Chosun liberated to be incorporated into the liberal system nations and maritime forces consisting of British, American, and Japan rather than the social system nations and continental forces such as Russia and China.
    Kim Sungsoo and Song Jinwoo of Donga Ilbo, Choe Rin of Cheondogyo carried forward the self-governing movement with not only domestic nationalists, but also external nationalist. Ahn Changho, Lee Seungman, and Park Yongman engaged themselves in this movement.
    The socialists attacked as national frame the leaders of Research Association of Politics. Especially they attacked Kim Sungsoo of Donga Ilbo and Lee Kwangsoo of Heungsadan led by Ahn Changho. They criticized Lee Kwangsoo’s articles which were appeared in Donga Ilbo and asserted legal activities. And they did boycott campaign of Donga Ilbo. As a result, the members of Research Association of Politics did not develop self-governing movement.
    By the way, in 1925, the possibility of self-governing got higher. Officials of Japan government or Japanese general government, and Politicians of Japan said often to leaders of Research Association of Politics it. So they were convinced that self-governing would come true soon, and that the government would be built through general election.
    Each group of Research Association of Politics made an effort to form self-governing association together and form or intensify each organization similar to political party individually. And each group made farmer organization to come to power by supporting of peasants in general election. In this process, competition and differentiation occurred within the association. In the newspaper, the Chosun Ilbo broke out, and in Cheondogyo the division broke out to the New and the Old. The members of the Chosun Ilbo and the Cheondogyo Old had an affiliation with socialist, especially the Tuesday group.
    The socialist and the left of nationalists developed the 10th June Mansei Movement to get the hegemony of national movement. And they attacked the right of nationalists on the ground of anti-nationalism. In consequence, members of Ahn Changho group and Lee Seungman group took a few step back.
    As a result, socialists and the left of nationalists frustrated the self- governing movement of the right of nationalist. But if the Japan gave Korea the autonomous right, the right of nationalists could get the self- government. To the right of nationalists, there were a lot of believers and supporters of close-knit by beliefs and ect. This was an important background of the foundation of Singan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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