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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해(洪量海, 1724~1778)를 위한 변론- 부사견와부군사실기(父師堅窩府君事實記) 를 중심으로- (In Defense for Hong Yang-hae(洪量海, 1724-1778): Focusing on Busa-gyeonwa-bugun-sasilgi(父師堅窩府君事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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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3.17 최종저작일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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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해(洪量海, 1724~1778)를 위한 변론-  부사견와부군사실기(父師堅窩府君事實記)  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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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 수록지 정보 : 한국사상사학 / 78호 / 361 ~ 410페이지
    · 저자명 : 구만옥

    초록

    홍양해(洪量海)는 18세기 후반 호서(湖西)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노론(老論)-호론(湖論) 계열에 속했고, 정치적으로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인 정조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경주김씨(慶州金氏) 김한록(金漢祿)-김귀주(金龜柱)와 밀착한 행보를 보였다.
    홍양해는 정조 2년(1778) 서명완(徐命完)의 고변으로 발생한 옥사에서 불온한 무리들의 배후로 지목되어 추국(推鞫)을 받았고, 역모를 꾀했다고 실토함으로써 극형을 당했다. 홍양해의 옥사 과정에서 그의 집안에 보관되었던 많은 문헌들이 사라졌고, 그로 인해 그의 생애와 학문을 조명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 글은 그동안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부사견와부군사실기(父師堅窩府君事實記) (이하 사실기 로 약칭)를 중심으로 홍양해의 생애와 학문적・정치적 활동의 일부분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사실기 는 홍양해의 조카인 홍병례(洪秉禮)에 의해 순조 33년(1833) 무렵에 일단 정리되었고, 이후 집안 사람들에 의해 일부 내용이 수정・보완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기 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홍양해의 행적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일종의 ‘행록(行錄)’이며, 후반부는 ‘부록(附錄)’으로 홍양해의 옥사와 관련한 이야기, 옥사 이후 홍양해 가족들의 행적, 홍양해와 관련 있는 주요 인물들의 언행이나 처신을 주변 사람들이 남긴 증언과 필자 자신이 전문(傳聞)한 사실에 의거하여 기술하였다. 사실기 에서는 각각의 기사를 별도의 단락으로 나누어 서술했는데, ‘행록’에 110개, ‘부록’에 40개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홍병례가 사실기 를 저술한 주요 목적은 홍양해의 신원(伸冤)을 위한 ‘변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조 2년의 옥사가 무옥(誣獄)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사실기 에서는 홍봉한(洪鳳漢)과 홍국영(洪國榮)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으며, 특히 홍국영이 어떠한 방식으로 옥사를 배후 조종했는지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밝히고자 했다. 아울러 홍양해는 이러한 난신적자(亂臣賊子)와 그 당여(黨與)를 제거하고자 노력한, ‘애군우국(愛君憂國)’의 정성을 간직한 인물로 추앙하였다. 그러나 홍양해의 결안(結案)과 국왕의 반교문(頒敎文)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병례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전문을 토대로 19세기 초반까지의 관련 기록을 재정리함으로써 홍양해의 신원을 위한 기초 자료를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사실기 의 ‘변론’은 당대에 즉각적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홍양해의 신원은 고종 원년(1864)에 가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영어초록

    Hong Yang-hae(洪量海) was one of the representative Confucian scholars in the Chungcheong Province during the late 18th century. Academically, he was part of the Noron-Horon(老論-湖論) faction which succeeded Song Si-yeol(宋時烈) to Kwon Sang-ha(權尙夏) and Han Won-jin(韓元震). Politically, he was closely associated with the Gyeongju Kim clan(慶州金氏), namely Kim Han-rok(金漢祿) and Kim Gui-ju(金龜柱), who opposed the succession of King Jeongjo(正祖), the son of Crown Prince Sado(思悼世子).
    In 1778, Hong Yang-hae was implicated in a treason case initiated by Seo Myeong-wan(徐命完)’s accusation. He was identified as the mastermind behind a seditious group and was subjected to interrogation. He confessed to plotting treason, which led to his execution. During the legal proceedings against him, many documents preserved by his family disappeared, making it difficult to acquire materials that illuminate his life and scholarship.
    This article aims to reconstruct parts of Hong Yang-hae’s life, academic, and political activities, focusing on the Busa-gyeonwa- bugun-sasilgi(hereafter abbreviated as Sasilgi), which has not received much attention from researchers. The Sasilgi was initially organized around 1833 by Hong Yang-hae’s nephew, Hong Byeong- rye(洪秉禮), and is presumed to have been modified and supplemented by family members thereafter. The Sasilgi is divided into two main parts: the first is a chronological record of Hong Yang-hae’s activities, a sort of ‘Annals,’ and the second is an ‘Appendix’ detailing the story of his trial, the actions of his family after the trial, and the testimonies and hearsay from people about the words and deeds of key figures related to Hong Yang-hae. The Sasilgi included 110 articles in the ‘Annals’ and 40 in the ‘Appendix’, and divided each article into paragraphs and described them as separate items.
    The main purpose of Hong Byeong-rye’s Sasilgi was to ‘advocate’ for Hong Yang-hae’s exoneration. To achieve this, he needed to prove that the 1778 trial was a false accusation. The Sasilgi pointed Hong Bong-han(洪鳳漢) and Hong Guk-yeong(洪國榮) as the main culprits, especially demonstrated how Hong Guk-yeong manipulated the trial from behind the scenes, using relevant testimonies. Furthermore, Hong Yang-hae was revered as a person who “loved the monarch and cared for the country,” striving to eliminate the traitors and their associates. However, given the existence of Hong Yang-hae’s ‘final confession’ and the king’s ‘proclamation,’ this was not an easy task. Nonetheless, Hong Byeong-rye sought to leave foundational materials for Hong Yang-hae’s exoneration to posterity by reorganizing related records up to the early 19th century based on testimonies and hearsay from people. The ‘defense’ in the Sasilgi failed to affect at the time, and Hong Yang-hae’s exoneration was only achieved in 1864.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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