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불교와 유교 그리고 무속"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무속 신앙 발표
1) 무속의 기원
2) 무속의 시대사
3) 풍수
4) 무속의 특징
3. 불교의 흡수와 영향
1) 불교의 흡수
2) 귀신관, 구원관 그리고 장례문화
4. ‘관계’와 ‘연속성’의 종교, 유교
1) 유교를 종교라고 볼 수 있는가?
2) 유교에서의 믿음, "관계"를 통한 구원
3) 유교의 삶과 죽음에 관한 사고, “연속성”
4) 제사에 관하여....
5) 유교가 한국역사에서 흥할 수 있었던 이유
6. 결론
본문내용
서론
무속, 불교, 혹은 유교가 받아들여졌던 것은 인간의 보편적 필요인 '구원'의 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궁극 가치나 진리에 대한 물음에 답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구복과 의지처에 관한 대중 일반의 관심에 답해준 것이다. (무속은 후자에만 해당. 유교는 조선 건국 즈음에야 구원의 종교가 됨.) 각 종교는 시대에 따라 국가가 공식적으로 지향하는 이념이 되기도 하고, 사회적 영향만을 갖기도 하고, 정치원리나 문화소양으로서의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종교는 아닌) 지위를 갖기도 한다. 불교국가 1천 년, 유교국가 5백 년 동안 각각의 종교가 어떤 점 때문에, 그리고 어떤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살펴본다.
무속 신앙 발표
1. 무속의 기원
무속이란 무엇인가?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무복(巫服)을 입고 춤을 춤으로써 보이지 않는 신을 강신(降神)하게 하는 능력을 지닌 여사제(女司祭)를 중심으로 이어져 오는 종교습속’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속은 한반도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전 세계의 샤머니즘이 그렇듯, 무속의 기원 역시 불분명하다.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토속 종교들이 그렇듯이 인류가 고등한 정신 체계를 가지면서 자연과 영적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로 인해 자연스레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고조선의 군주인 단군 왕검에서 단군이 제사장을 의미한다는 기록과 삼한에 무당이 다스리는 소도(蘇塗)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역사 시대에 접어들기 전 무속이 형성되었고, 무당이 정치적 지도자도 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무속의 시대사
삼국시대가 시작되고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무속은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예가 『삼국유사』에서 신라 초기 왕을 뜻했던 단어 중 하나인 ‘차차웅’이 무당을 칭했다는 단어나, 신라 왕실의 여성이 시조제를 주관했다는 점에서 왕 혹은 왕실의 인사가 무당이 되어 제를 주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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