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 5년(1356년) 개혁의 성격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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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5년(1356년)의 개혁, 반원개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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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4
문서 내 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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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민왕의 생애와 정치적 배경공민왕(1330-1374)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질자로 원나라에 가 10년간 숙위 생활을 했다. 1351년 원의 책봉으로 22세에 즉위했으며, 재위 23년 동안 4차례 개혁 교서를 반포했다. 공민왕은 고려인 모계와 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반원적 의식을 형성했으며, 기철 등 부원세력 제거, 정동행성 이문소 혁파, 북정군 파견, 지정 연호 중지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왜구와 홍건적 침입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리면서 신돈 등용 이후 개혁 의지가 퇴색되었고, 1374년 환관 최만생에게 시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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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민왕 5년 개혁의 구체적 내용과 반원개혁론1356년 음력 5월 공민왕이 단행한 개혁은 기철·노책·권겸 등 부원세력 3대 거두 제거, 정동행성 이문소 혁파, 압록강 서쪽 8참과 쌍성총관부 공격, 원의 지정 연호 사용 중지, 문종구제에 입각한 정치 제도 개혁 등으로 구성되었다. 민현구 선생은 이를 반원개혁으로 평가하며, 공민왕이 원 중심 세계질서에서 이탈하겠다는 공언이라고 해석했다. 개혁 후 원과의 관계는 냉랭해졌으며 국경에 장벽이 생기고 왕래가 급감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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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반원개혁 비판론과 왕권 강화론김경록, 이강한, 이명미, 최종석 선생 등은 공민왕 5년 개혁이 반원이 아니라 국내 정치에서 왕권 강화와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기철 세력 제거는 국왕권에 도전한 세력 제거이며, 정동행성 이문소 혁파는 국왕의 보거권 회복이었다고 본다. 또한 공민왕이 원 중심 조공체제에서 이탈하지 않았으며, 지정 연호도 이후 계속 사용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명미 선생은 기씨 세력과의 양자 구도에서 개혁을 해석하며, 반원이 왕권 강화의 수단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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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조구제 회복론과 이익주 선생의 재반박이강한 선생은 공민왕의 개혁을 세조구제 회복으로 평가했으나, 이익주 선생은 이것이 세조구제를 극복한 개혁이라고 반박했다. 1356년 10월 고려가 원에 보낸 서한의 요구사항(정동행성 이문소 혁파, 만호부제 폐지, 물자 징발 중지, 쌍성 반환)은 세조구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원의 영토로 공인된 쌍성총관부 공격과 고려 고토 회복은 세조구제를 뛰어넘은 조처이며, 이는 기존 고려-원 관계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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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민왕의 생애와 정치적 배경공민왕은 고려 말기의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왕권 회복을 시도한 중요한 군주였습니다. 원의 영향력 아래에서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당시 시대적 맥락에서 매우 의미 있었습니다. 다만 원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성과 귀족 세력과의 갈등은 그의 개혁 정책 추진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공민왕의 생애는 고려 멸망 직전 왕권 강화를 위한 진지한 시도였으나, 근본적인 사회 구조 개혁까지는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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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민왕 5년 개혁의 구체적 내용과 반원개혁론공민왕 5년의 개혁은 원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고려의 전통적 제도를 회복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이었습니다. 원의 관제 폐지, 고려식 관복 복구, 전민변전과의 폐지 등은 실질적인 자주성 회복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반원개혁론은 이러한 개혁이 원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했다고 비판하지만, 당시 고려가 원의 완전한 종속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다만 개혁의 급진성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초래했다는 점은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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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반원개혁 비판론과 왕권 강화론반원개혁 비판론은 공민왕의 개혁이 현실적 국제 정세를 무시한 과도한 시도였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일정한 타당성이 있으나, 왕권 강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공민왕의 개혁은 고려 왕실의 자주성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었습니다. 원의 영향력 아래에서는 진정한 왕권 강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두 입장의 대립은 현실적 타협과 이상적 추구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며, 역사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한 공민왕의 노력이 고려 멸망 이후 조선 건국의 정당성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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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조구제 회복론과 이익주 선생의 재반박세조구제 회복론은 고려의 전통적 통치 체제로의 복귀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공민왕의 개혁을 이러한 맥락에서 평가합니다. 이익주 선생의 재반박은 이러한 회복론이 과거 이상화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현실적 정치 상황을 고려한 실용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두 입장 모두 일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나, 역사적으로는 공민왕의 개혁 시도가 비록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고려 말기 왕권 회복의 진지한 노력이었으며, 이는 이후 조선 건국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