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과 김옥균 인물 재평가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최초 생성일 2024.11.10
6,000원
AI자료를 구입 시 아래 자료도 다운로드 가능 합니다.
새로운 AI자료
생성
다운로드

상세정보

소개글

"갑신정변과 김옥균 인물 재평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갑신정변과 김옥균
1.1. 김옥균의 생애
1.2. 갑신정변
1.2.1. 갑신정변의 전개
1.2.2.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과 의의
1.3. 김옥균의 평가와 해석
1.3.1. 북한에서의 김옥균
1.3.2. 남한에서의 김옥균
1.3.3. 평가의 연구의 문제점
1.4. 참고문헌

2. 김옥균의 갑신정변, 최선이었는가
2.1. 문제의 제기
2.2. 개혁의 방향: 위로부터의 급진개혁
2.3. 정변의 전개: 준비되지 않은 혁명
2.4. 정변의 여파: 놓쳐버린 근대화의 골든타임
2.5. 참고문헌

3. 한국근대사, 감춰진 이야기 흥선대원군 조사 및 재평가
3.1. 서론
3.1.1. 흥선대원군 선정 이유
3.2. 본론
3.2.1.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국내 상황
3.2.2.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국외 상황
3.2.3. 흥선대원군의 내정개혁
3.2.4.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치
3.2.5. 흥선대원군에 관한 기존의 평가
3.3. 결론
3.3.1. 흥선대원군에 관한 재평가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갑신정변과 김옥균
1.1. 김옥균의 생애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에서 김병태와 송 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56년 오촌 숙부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에서 자랐다. 양부 김병기는 강원도 강릉부사를 거쳐 나중에는 형조참의의 지위까지 올랐던 명문의 사람이며, 이에 김옥균은 상류사회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인근 주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11세 때는 강릉의 율곡 이이를 모셨던 서원에서 그의 학풍을 배웠다. 1866년, 그가 16세일 때 양부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고 당시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 청의 아편전쟁 패배 등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내세우면서 서구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였고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박규수에 의해 자주적 개국론이 주장되었으며 민중들 사이에서는 동학이 전파되어 사상적으로도 혼란한 시기였다. 그가 22세 되던 187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직후부터 청년정치가로서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영향이 컸던 인물로는 오경석, 이동인, 유홍기, 박규수 등이 있다.


1.2. 갑신정변
1.2.1. 갑신정변의 전개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씨 외척 정권이 붕괴되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민씨 수구파는 청에 구원 요청을 하였고, 청은 조선에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사태를 진압하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여 보정부에 유폐하였다. 이렇게 청은 흥선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킨 후 민씨 외척 정권을 다시 수립하였으나 청군을 철수시키지 않을 채 무력을 이용하여 허구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을 적극적으로 간섭하였고 이에 조선의 자주 독립권을 심히 침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개화운동을 저지하고 개화당을 탄압하여 개화당의 정치적 지위가 매우 낮아졌다.

이에 개화당은 무장 정변의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달성하려 한 것이다. 1884년 청과 프랑스는 안남문제를 시작으로 전쟁의 불씨를 붙였다. 이에 청은 서울에 주둔한 3000여 명의 군사 중 절반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켰다. 이후 발발한 청불전쟁이 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이를 틈타 개화당은 정변의 시기로 삼고 그해 12월에 일을 단행하였다.

그해 10월 30일 일본 측의 적극적인 접근이 있었고, 이에 개화당은 무력 보충과 청의 견제를 위해 응하였다. 그래서 일본 측으로부터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00만 엔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또한 국내 내정 개혁에는 관여하지 않고 이는 오직 개화당에 권한임을 요구하여 일본 측의 동의를 얻었다.

마침내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국왕과 왕후를 경우궁으로 옮기고 수구파의 거물들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그리고 신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는데 신 정부 각료의 구성은 개화당 요인과 국왕 종친의 연립내각으로 되어 있었다. 신정부는 그 다음날인 12월 5일에 공포되었다. 또한 그들의 새로운 개혁 정치의 지침인 혁신 정강을 제정, 공포하였다.


1.2.2.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과 의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과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화파의 민족주의 운동을 밑에서부터 지탱해 줄 사회, 경제적 기반이 약했다는 것이다. 개국 이전부터 자본주의적 맹아가 일정 한도 싹트기 시작하였으나 대중들이 개화파의 사회적 지반을 이룰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 이에 광범위한 시민 층이나 농민 세력의 지지기반을 갖추지 못하였다.

둘째, 개화파의 사상적 제약성에서 비롯된 운동 방법상의 약점이다. 개화사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본질적 약점을 운동의 실천과정에서도 노정시켰다. 개화파는 궁극적으로 중앙집권적 입헌군주제라는 형태로 정치적 집중과 정치적 확산을 조화, 통일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위로부터 개혁이기에 농민 세력이나 상공인들의 투쟁에 의존하려 하지 않았다. 이 같은 그들의 사상과 개혁 방법은 그들이 정변을 단행함에 있어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셋째, 갑신정변 직전의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판단을 하고, 청불전쟁이 미칠 영향에 지나치게 큰 기대를 한 것이다. 1884년의 청불전쟁으로 청이 매우 곤경에 처한 것은 맞지만, 서울에는 1884년 12월 현재 아직도 원세개가 이끄는 1500여 명의 청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과도적 조치라고는 하지만 청군에 비해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150여 명의 일본군에 과대한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은 잘못이었다.

이렇게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첫째로 정치적으로는 청과의 전통적 외교관계인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로, 문벌의 폐지와 인민 평등권 확립으로 봉건적 신분제를 타파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근대적 국가로 향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급진적이었고,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며 무력을 사용하여 정변이라는 방법으로 개화를 시도하였고 끝내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는 다음에 등장할 근대화, 개화를 더욱 소극적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1.3. 김옥균의 평가와 해석
1.3.1. 북한에서의 김옥균

북한에서의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남한보다 적극적이며 이른 시기부터 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해방 이후 북한학계에서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서술한 최초의 통사는 『조선민족해방투쟁사』이다. 이 책에서는 갑신정변을 "봉건국가를 근대국가로 건설하려는 최초의 개혁운동"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일본 제국주의에 이용되었고 농민과 연결이 없었던 점을 들어 그 실패가 필연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갑신정변 주준의 집필자는 근로대중만이 진정한 변혁주체라 보고 김옥균 등의 활동을 과거 당쟁의 연장선상에서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지배체제가 어느 정도 확립되는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북한의 연구경향은 변화하게 된다. 리나영은 「1884년 갑신정변에 관한 연구」를 통해 갑신정변을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개혁운동"으로 규정하면서도 "조선사회 발전의 객관적인 합법칙성에 의거하여 봉건조선을 개변시키려 했던 것에 일정한 긍정적 측면이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긍정적 평가는 이후 북한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58년 3월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김일성의 연설을 계기로 김옥균과 갑신정변 연구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김일성은 김옥균을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반봉건적 부르주아 개혁운동가"로 평가하며, 그에 대한 역사적 위상을 새롭게 조명한다. 이를 반영한 『조선근대혁명운동사』...


참고 자료

조재곤,1993,「기획2 남북에서 상반되게 평가하는 인물 김옥균-혁명가인가 친일파인가」, 『역사비평사』,
최영호,1997,「북한 역사학의 특성과 문제점」, 『한국사 시민강좌』, 20,
정영희,1999,「김옥균의 개혁사상 연구」, 『역사와 실학』, 12, 367-393
하원호,2000,「[인물바로보기 1] 근대여명의 ‘비상한’ 혁명가 김옥균」, 『내일을 여는 역사』,
하원호,2000,「[남북 역사인식 비교] 갑신정변, 근대변혁운동의 서막인가 민중의적의 정변인가」,『통일시론』,
김영작, 2002, 「김옥균 - 시대를 앞질러간 개혁의지」, 『한국사 시민강좌』, 31
한철호, 2004, 「개화일제강점기 김옥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사와 담론』, 38
김도형(2011), 일본 관료: 이토 히로부미, 세손출판사
데일리안 사회부(2008), 박효종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미화는 없다”, 데일리안
박영준(2014), 청일전쟁 전후 일본의 대외전략과 군사정책: 근대화 우선론과 대륙팽창론의 상호 대립과
전개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총론 제36집 1호
유바다(2010), 1883년 김옥균 차관교섭의 의미와 한계, 한국근현대사연구 54
임종국(1991),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전봉관, 역사를 뒤바꾼 사흘: 의문의 혁명 갑신정변
전봉관(2014), 전봉관의 인문학 서재: 왜 ‘한국의 영웅’은 ‘일본의 영웅’을 단죄했을까, 조선일보
함규진(2015), 한 떨기 벚꽃처럼 지사의 길을 가다, 인물과 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2013), 김옥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2013), 갑신정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흥선대원군, n.d,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D%A5%EC%84%A0%EB%8C%80%EC%9B%90%EA%B5%B0
한성신보
장영숙, 2020, “『한성신보』의 흥선대원군에 대한 인식과 평가”, 한국사학보
신편한국사, n.d, 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38_0010
김은실, 2014,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인물사 학습지도 방안”,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흥선대원군, n.d, 국사편찬위원회-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https://sillok.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연갑수, 2000, “대원군과 서양 - 대원군은 쇄국론자였는가 -”, 역사비평 2000년 봄호(통권 50호), 105 - 149 (45page)

주의사항

저작권 EasyAI로 생성된 자료입니다.
EasyAI 자료는 참고 자료로 활용하시고, 추가 검증을 권장 드립니다. 결과물 사용에 대한 책임은 사용자에게 있습니다.
AI자료의 경우 별도의 저작권이 없으므로 구매하신 회원님에게도 저작권이 없습니다.
다른 해피캠퍼스 판매 자료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용도로만 이용해 주셔야 하며, 수정 후 재판매 하시는 등의 상업적인 용도로는 활용 불가합니다.
환불정책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 다른 자료와 70% 이상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 (중복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필요함) 인터넷의 다른 사이트, 연구기관, 학교, 서적 등의 자료를 도용한 경우 자료의 설명과 실제 자료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