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 론
1.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광복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다양한 정부 구성을 거쳐왔다. 초기 민간정부에서 군부 쿠데타로 인해 정권이 바뀌었고, 다시 문민정부로 돌아왔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군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여전히 군부 정권이 지속되고 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무능한 정부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군부와 그 전후의 정부를 이해하고, 그 원동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민과 군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왔고, 이에 대한 올바른 관계 설정의 필요성에 대해 평가해보고자 한다.
1.2. 연구의 범위와 방법
본 연구는 주로 최근에 발간 및 발표된 책자, 논문 등 각종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분석(인용)하였다. 국내외 서적 및 논문, 최근발간된 국내학계의 연구물, 국방부, 발간되는 근현대사 눈문집과 간행물을 그리고 인터넷 자료들을 인용하는 등 문헌적 연구방법에 기초하였다. 우선적으로 광복이후의 역사부터 알아보고 각 공화국별 대통령과 정부수립과정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 중점을 두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광복이후부터 현재의 정부까지의 민과 군의 관계가 그 중요성이 더해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도 평가해 볼려고 한다는 것이다.
2. 대한민국 공화국별 민군관계
2.1. 제1공화국 민군관계
2.1.1. 개요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공포되면서 국방부가 설치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선포와 더불어 미군정이 종식되었다. 이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조선 과도정부의 행정 이양 절차에 의거 1948년 9월 1일 잠정적인 명칭으로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으로 편입되었고, 그 명칭도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다. 초기 국방부는 광복군의 독립투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수립되었고, 광복군 출신이 수뇌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창설 2개월만에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반공이념교육이 확실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지속적으로 장교를 배출하고, 1950년 10만명정도의 국군이 있었다.
2.1.2. 제1공화국의 민군관계
제1공화국의 민군관계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국군은 미국군대 제도를 따라 군을 조직하고 편성, 교육, 훈련, 관리의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공비토벌과 6.25전쟁 등 실전을 통해서 유형과 무형의 전투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문제는 신생국 군대가 그렇듯이 군의 직접주의를 보장해주지 않고, 군인은 문민우위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군인들에게 정치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 당시 군인은 직업주의를 보장해주지 않고, 민족반역자의 대피호나 미국의 용병으로 매도 당하고, 수뇌부가 공산당으로 몰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군인사마저도 정치적으로 입김을 작용하여 자기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임명하기도 했다. 그래서 군인들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대우도 좋지 않아서 불평하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이승만의 계책으로 군 장교단을 파벌과 만연한 부정부패를 이용하여 서로 충성경쟁을 하도록 부추겼다. 그래서 정치적인 게임에 많이 이용당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충성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김구 선생의 암살 또한 그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2.1.3. 제1공화국 민군관계 평가
제1공화국은 민간엘리트와 군부엘리트간의 대립이 많았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군대의 영향력은 증대되었고 민간정부의 후원자로 직접 정치게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대립을 이용하고, 또 군내부의 파벌주의를 이용하여 군을 정치화하고 그걸 통제방법으로 삼았다. 그러는 동안 젊은 장교는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전문화되고 근대문명에 빨리 눈을 떴으며, 신직업주의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적인 부패와 무능을 보고 군의 정치참여가 필요하다고 적극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2.2. 제2공화국 민군관계
2.2.1. 개요
1960년 4월 19일 학생들과 지식인, 그리고 시민에 의해서 이승만 장기독재정권을 종지부를 찍게 하였는데, 이러한 4.19 학생혁명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로 시작되었다. 이에 이승만대통령은 하야를 하고 허정 과도정부가 출범했다. 이때 국방부장관은 이종찬이였고 육군본부에서 첫 주요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그 때 회의를 하면서 박정희는 개혁의 의지를 내비추었다. 10개월의 짧은 정부지만 대한민국 근대화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이 있었다.
2.2.2. 제2공화국의 민군관계
제2공화국의 민군관계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전면적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민주당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