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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에게 제공된 문서들
1.1. DADA의 시대적 배경과 전개
다다는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전후까지 스위스, 독일, 프랑스에 걸쳐 미술, 문학 등의 분야에서 일어난 일종의 반항운동이었다. 1916년 2월 초, Hugo Ball에 의해 쮜리히의 'Cavalet-voltaire'에서 루마니아의 시인 Tristan Tzara와 Marcel Janko, 독일의 Richard Hulsenbeck, 프랑스의 Hans Arp 등이 모여 Cavalet Voltaire Group을 형성하고 다다를 선언했다. 다다는 "yes, yes"를 의미하는 루마니아어 DA DA에서 유래했으며, 프랑스어로는 '장난감 목마', 독일어로 '유모차'와 생식의 기쁨간의 관념의 연상 작용에서 비롯한다. 이 단어 자체가 뜻없는 말인 것과 같이 어법을 무시하고, 뜻없는 낱말의 연결로 일체의 의미와 논리성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 가치, 모럴, 관습, 규칙 이념에서 이성과 사회질서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부정과 철저한 파괴를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을 겪은 그들은 전쟁에 대한 증오와 물질주의에 대한 증오로 기존질서들을 야유와 풍자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때까지의 정신적 질서를 포기하고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 했는데, 이전의 예술이 현실의 삶과 유리되어 그 본질적인 생명력을 잃어감에 따라 예술가들은 삶과 예술과의 사이에서 갈등과 불만이 쌓이게 되었고, 이는 다다를 계기로 폭발하게 된다. Tristan tzara는 반예술을 선언하면서 "예술은 새로운 세계에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잠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까지의 선천적 무조건적으로 가치를 부여받은 예술에 반기를 들고, 전쟁의 죽음, 학살, 사회적 불안과 정신과 물질의 단절에서 오는 허무감으로 인한 예술의 정신적 타락으로 흐르는 위기를 막아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다이스트들은 이전의 전통적 예술을 현실의 망각한 예술이라고 비난하였고, 생에 뿌리를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정하여 새로운 예술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예술의 개념을 표현에서 선택으로 변모시켰는데, 뒤샹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 즉 병걸이나,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을 전시장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일상의 생활 기물들을 예술품으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기존 예술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으나, 현대 기계문명의 모순을 교활하고 야유적인 방법으로 통쾌하게 반박한 것이자 미적 발전을 위한 도약이었다. 이는 곧 현대 예술 작품들 중에 다다에서 근원한 정신을 흔히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1.2. 마르셀 뒤샹의 생애
마르셀 뒤샹은 1887년 7월 28일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동네 블렝비에에서 성공한 공증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남매 가운데 두 형은 아버지가 반대하는 예술가가 되었는데 바로 화가 자크 비용과 입체파 조각가 레이몽 뒤샹 비용이다. 누이 수잔느도 화가가 되어 나중에 화가남편 장 크로티와 함께 다다에 동참했다. 그러나 뒤샹이 예술가가 되는데는 아버지의 특별한 반대가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의 예술에 대한 재능은 타고난 것 같은데 할아버지 에밀 니콜은 성공한 화가였고 아버지도 재능있는 판화가였다. 파리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공부하며 신문에 이따금 드로잉을 기고했으며 잠시 도서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이 무렵 파리 북서쪽 퓌토에 있는 뒤샹 형제의 화실에서는 매주 일요일 아폴리네르, 피카비아, 레제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그후 1910년에 그린 과 에는 세잔느의 영향과 입체주의 회화방법이 보이고 뒤이어 1911년에 입체파의 일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1913년 아모리 쇼에 (1912)를 출품해 큰 물의를 빚은 뒤로 뉴욕에서 피카비아와 함께 다다 운동을 시작한다. 1913년부터 다다이즘의 선구로 보이는 반예술적 작품발표를 시작, 1915년 도미하자 이듬해 뉴욕에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키고 스티글리츠의 후원을 받아 정기 간행물 291 을 창간했다. 유태인 스티글리츠는 일찌감치 유럽의 모더니즘을 미국에 이식한 사진가로 맨하탄 5번가 291번지에 화랑을 열고 아방가르드 작품을 소개했는데 주소를 따서 화랑을 291이라고 불렀다. 1918년 마지막 유화 을 제작한 뒤로는 회화와 결별하고 서양 장기에 몰두해 프랑스와 미국의 수많은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미국인 예술 수집가 캐서린 드라이어와 만 레이와 함께 1920년 미국 최초의 현대미술 뮤지엄 무명사회(Societe Anonyme)를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에 협력, 1941년 A.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초현실주의전을 열었다. 1966년 회고전이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성대하게 열렸으며 마지막 작품 가 완성되었다. 1968년 프랑스를 방문하던 중 10월 2일에 타계했다. 가족들과 함께 유해가 안장된 루엥 묘지의 묘비에는 "모든 것들은 같다. 그것들은 늘 사망한 다른 것들이다."라고 적혀있다.
1.3. 뒤샹의 작품들
1.3.1. 뉴욕 예술가들의 대부: 뒤샹
마르셀 뒤샹은 1913년 아모리 쇼에 (1912)를 출품해 큰 물의를 빚은 뒤로 뉴욕에서 피카비아와 함께 다다 운동을 시작한다. 1913년부터 다다이즘의 선구로 보이는 반예술적 작품발표를 시작하였고, 1915년 도미하자 이듬해 뉴욕에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키고 스티글리츠의 후원을 받아 정기 간행물 《291》을 창간했다. 유태인 스티글리츠는 일찌감치 유럽의 모더니즘을 미국에 이식한 사진가로 맨하탄 5번가 291번지에 화랑을 열고 아방가르드 작품을 소개했는데 주소를 따서 화랑을 291이라고 불렀다.
당시 뉴욕 화단에서 마르셀 뒤샹의 위치는 대단했다. 20세기 예술의 개선자라 할 만한 그의 명성은 1913년 아모리 쇼에서 를 소개한 후 더욱 높아졌다. 1915년 뉴욕 다다를 창설하면서 미국미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뒤샹은 불가해한 예술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가 문제의 작품으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뒤샹은 미국에서 얻지 못한 영광을 대신 얻게 되었다.
뒤샹은 1918년 마지막 유화 을 제작한 뒤로는 회화와 결별하고 서양 장기에 몰두해 프랑스와 미국의 수많은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미국인 예술 수집가 캐서린 드라이어와 만 레이와 함께 1920년 미국 최초의 현대미술 뮤지엄 무명사회(Societe Anonyme)를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에 협력, 1941년 A.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초현실주의전을 열었다. 1966년 회고전이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성대하게 열렸으며 마지막 작품 가 완성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뒤샹의 이름은 새로운 운동들과 지속적으로 관련되었다. 1960년대에 뒤샹의 이름은 다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라우센 버그와 존슨의 네오다다 행위와,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등의 팝아트 경향이 뒤샹의 미학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오다다와 팝아트 예술가들에게 별로 호감을 보이지 않았던 뒤샹은 취리히 다다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한스 리히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네오다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이라고 부르면서 팝아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쉬운 방법으로 다다처럼 행위한다. 내가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사용한 것은 미학을 낙담시키기 위해서였다. 네오다다 예술가들은 나의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거기서 미학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하며 전람회에 출품하는 등 전통 미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는 사물의 완벽한 재현이 미학의 근본적 존재 이유라면 이미 사진술과 영화로 그러한 미학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뒤샹은 작품활동이 왕성했던 작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실험을 순차적으로 실시했던 과학자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궤변적 사유는 가치의 혼돈을 초래했지만, 동시에 미학적 가치에 대한 사고의 폭을 넓혔으며 대량생산품, 이미 제작된 물건에 대해 새로운 의미부여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1.3.2. 전통미학에 도전하다
유럽에 많은 예술가들이 전쟁터로 나가야 했지만 건강이 나빠 징집이 면제된 뒤샹은 대규모 학살 전쟁을 저지르고야마는 인간 이성을 비웃는 작품들로 전통 미학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1914년 "병 말리는 기구를 사서 라는 제목으로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궤변을 폈다. "예술품이란 색을 칠하거나 구성할 수도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미 만들어진(Ready Made)'물질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예술가의 창조행위를 제작에 한정하지 않고 발견 또는 창조적인 행위임을 역설했다.
뒤샹은 에 관한 글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것들은 미학적 유쾌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각적 무관심에 대한 반발이었다. 동시에 좋거나 나쁜데 대한 감각을 완전히 배제한 완전한 마취였다."
역시 그에 의해 예술품으로 선택된 피라미드처럼 생긴 다섯 층의 컵걸이는 지금 파리의 퐁피두 센터 천장에 매달려 있다. 이처럼 뒤샹은 예술과 무관한 것을 예술과 접목시키면서 전통적인 예술의 가치등급에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물질을 소개하여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