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1.1. DDP 소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이하 DDP)는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건축물로,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복합문화시설이다. DDP는 서울 동대문 일대에 자리했던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야구장을 허물고 새로 조성되었다. 당초 이 부지에서는 지역 경제 활성화와 서울의 대표적인 패션 디자인 센터 건립을 계획했다.
DDP는 연면적 86,574㎡의 규모로, 지하 3층, 지상 4층의 건물이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DDP를 설계하면서 한국의 자연과 문화적 요소들을 반영하고자 했다. 특히 동대문 지역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리듬, 사람들의 움직임을 설계에 반영하였다고 한다. 또한 건물 주변 청계천의 물줄기와 주변 산들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건축 형태를 구현했다.
DDP는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등 크게 5개의 시설과 15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알림터는 국제회의장, 디자인 전시관 등 공연과 전시가 열리는 공간이다. 배움터에는 디자인 박물관과 디자인 둘레길이 있어 디자인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살림터는 디자이너 갤러리샵과 디자인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이처럼 DDP는 디자인, 문화, 예술, 상업 등 다양한 기능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DDP는 서울시가 2006년부터 추진한 "강북 도심 부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은 동대문운동장을 허물고 서울의 대표적인 패션 디자인 센터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따라 2007년 DDP의 기본구상이 제시되었고,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되었다. 2009년 4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개장했고, 2013년 11월 DDP 건물 공사가 완료되었다. 2014년 3월 DDP가 최종 개관하면서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이자 패션·디자인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DDP의 조성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시민참여와 국제적 현상설계 공모전 개최였다. 서울시는 DDP 사업에 대한 시민의 관심을 높이고자 시민아이디어 공모전을 실시했다. 일반 시민과 전문가 모두가 참여했으며, 그 결과를 반영하여 DDP 계획에 경기장 보존 등의 내용을 포함시켰다. 또한 국내외 유명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지명초청현상설계경기를 통해 최종 당선작을 선정했다. 이처럼 DDP는 시민참여와 국제적 경쟁을 통해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2. DDP 역사
1.2.1. 훈련원 및 훈련도감
조선 건국 직후에 설치된 훈련원은 태조 3년에 군사의 진법훈련과 교육을 담당하던 중군훈련소를 흡수하면서 군사 교육과 훈련을 주관한 조선의 명실상부한 군사 기구였다. 군사 정예화를 위해 활쏘기, 창법, 격구같은 훈련이나 진법훈련 등을 주관하였으며, 무사를 대상으로 한 각종 시험을 주관하고 습독관 제도를 두어 각종 병법서의 교육을 주관하였다.
16세기 이후 군사 확보가 어려워지는 등 군사제도의 부실화와, 임진왜란을 맞이해서는 군사의 동원이 불가능해지면서 류성룡의 주도하에 설치된 기관이 훈련도감이다. 저술체계의 변화 속에서 창설되어 급료병체계와 화약무기를 다루는 군사들로 구성되어 약 5천명의 군사를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도감은 훈련도감의 분영 중 한 곳으로, 효종 때 한양의 동쪽이 부실하다고 하여 만들어 군사를 주둔하게 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하도감에는 조총과 궁전, 화약을 저장하는 창고를 두었으며, 화기제작을 하고 연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항 이후 군사 제도가 개편되면서 신식 군대인 교련병대가 창설되고, 하도감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가 1882년 폐지되었다. 한편, 훈련원 또한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군대 해산과 함께 폐지 되었다.
1.2.2. 경성운동장
1925년 일제는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경성운동장을 설립했다. 경성운동장은 육상경기장, 야구장, 정구장, 수영장, 마장을 갖춘 대규모 체육시설이었다. 수용인원은 25,800여 명이었고, 규모는 75,000㎡였다.
일제는 구릉지의 지형 덕분에 관람석을 자연스럽게 배치할 수 있었고, 이러한 대규모 건축물을 세우기에 알맞다고 판단하여 하도감 터에 경성운동장을 건설하였다. 이는 조선인을 스포츠에 관심 갖게 해 항일의 기운을 꺾고자 한 우민화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경성운동장의 건설은 조선인에게 새로운 민족정신의 분출구가 되었다. 조선인들은 스포츠를 통해 민족의 우월성을 나타내 일본인을 제압하고자 하는 항일민족투쟁을 펼쳤다. 이에 대해 일제는 1932년 학생 야구를 제한하는 등 대응조치를 취하였다.
해방 후 1948년 경성운동장의 명칭이 서울운동장으로 바뀌었다. 서울운동장은 체육행사는 물론, 국가 차원의 기념식과 정치적 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