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윤선도의 생애"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윤선도의 생애
1.1. 출생과 가계
1.2. 유배와 은거
1.3. 정치적 굴곡
1.4. 보길도와 금쇄동
2. 윤선도 사상의 기반
2.1. 가문의 학문적 전통
2.2. 호남 제일의 경제적 기반
2.3. 왕실과의 특수한 친분 관계
2.4. 서인에 대한 피해의식
2.5. 유교사상과 도교사상
3. 윤선도의 문학세계
3.1. 문학의 시기별 성격
3.2. 주요 작품 분석
3.3. 작품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윤선도의 생애
1.1. 출생과 가계
윤선도는 선조 20년(1587년) 6월 22일 서울 연화방(현재 한경 동부 연화방 자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계에서 주목되는 인물로는 고조 윤효정과 증조 윤구를 들 수 있다. 윤효정은 해남 윤씨 가문의 거대한 물적 기반을 다진 인물로, 김종직의 문하에 있었던 최부의 제자였다. 한편 증조 윤구는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기묘사화로 화를 당했던 전형적인 사림파 인물이었다. 윤선도는 8세에 맏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해남 윤씨 가문의 장손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종가의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고, 아름다운 남도의 자연 경관을 접하면서 풍부한 감수성을 기를 수 있었다.
1.2. 유배와 은거
윤선도는 30세(1616년) 때 당시의 권신인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첫 유배를 당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치적 시련을 겪으며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윤선도는 병자호란 이후 왕을 찾아뵙지 않았다는 죄로 두 번째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 때 그는 금쇄동에서 지은 작품 중 하나인 <오우가>를 창작하게 된다. <오우가>에서 그는 자연물인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벗으로 삼아 자연과 자신의 삶을 일체화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치적 현실에서 겪은 좌절과 번민을 자연 속에서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윤선도는 지속적인 유배 생활을 겪게 된다. 그는 74세 때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가 기년복을 주장하는 서인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의 예송논쟁에 개입하면서 송시열 등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다시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는 79세에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어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7년 4개월의 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냈다.
윤선도의 삶에서 유배 생활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시련과 극복", "득의와 풍류", "고난과 개척"이 교차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굴곡적인 삶 속에서 그의 사상적 깊이와 문학적 역량이 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배와 은거의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과 그에 대한 애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1.3. 정치적 굴곡
윤선도의 정치적 굴곡은 당쟁 속에서 시련과 고난을 겪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0세 때 권신 이이첨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처음 유배를 가게 된다. 당시 광해군 정권 하에서 권세가 있던 북인계열과 충돌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이후 6년간 경원과 기장에 유배되는 고난을 겪었다. 인조반정 이후 거듭 등용되지만 서인 정권 하에서도 배척을 받아 좌천과 유배를 거듭했다. 48세에는 성산현감으로 좌천되고, 52세에는 영덕으로 유배되는 등 여러 차례 시련을 겪었다. 이러한 정치적 고난은 효종 반정 이후에도 지속되어, 정개청을 신원하려다 송시열 등 서인 세력과 다시 대립하여 삼수로 유배되기도 했다. 윤선도는 이처럼 변화하는 정권과 당파 싸움 속에서 줄곧 어려움을 겪었지만, 강직한 성품으로 임금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유배와 좌천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4. 보길도와 금쇄동
보길도와 금쇄동은 윤선도의 삶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미친 공간이었다.
윤선도는 보길도를 51세부터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약 10년 간 거주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보길도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윤선도에게 심리적인 안식처가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대표작 중 하나인 '어부사시사'를 창작하는 등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쳐나갔다. 윤선도는 보길도의 부용동을 자주 오가며 정성당, 처원 등을 건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보길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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