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역사전쟁"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해방과 분단의 역사
1.1. 해방과 분단의 배경
1.2. 해방 직후 국내외 상황
1.2.1.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세
1.2.2. 미·소군정의 실시
1.2.3. 해방 직후 분단에 대한 좌우익 입장차이
1.3. 8.15 해방과 분단의 남북의 인식차이
1.4. 해방과 분단의 한국사적 의의
2. 6.25전쟁
2.1. 6.25전쟁의 전개 과정(1950-1953년)
2.2. 6.25전쟁의 결과
2.2.1. 대내적 결과
2.2.2. 대외적 결과
2.3. 6.25전쟁이 한국사적 의미
3.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해방과 분단의 역사
1.1. 해방과 분단의 배경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하게 된 배경에는 대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1943년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태평양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 미국은 곧바로 종전이후에 새로운 세계질서 성립을 위해 중국, 일본, 소련 등 여러 나라의 이익이 얽혀있는 한반도에 대한 국제적 논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1943년 12월에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는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한국은 자유롭고, 독립이 되어야만 한다"라고 선언을 하였다. 이는 카이로 회담에서 최초로 한국의 독립이 언급된 것이었다. 이후 1945년 2월에 진행된 얄타회담에서는 소련의 대일참전을 대가로 미국은 소련을 한국의 신탁통치에 참여시켜 줄 것을 허락하였다. 따라서 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는 국제간의 합의였던 것이다. 이후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과 영국, 소련은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 항복을 요구하면서 전후의 문제를 논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한다면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시켜 완전히 장악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깨달았다. 따라서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서 남한 지역을 미군이 점령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결국 얄타회담에서는 한반도 북부를 소련, 한반도 남부는 미국이 분할 점령하는 것이 논의 된 것이다. 한편, 포츠담회담이 한창이었던 시기 미국은 극비리에 추진 중이던 원자탄 실험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에 의해 8월 15일, 대한민국은 갑작스레 광복을 맞이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한국광복군을 통해 국내진공작전을 펼칠 계획을 세웠는데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망은 우리의 자주독립의 꿈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미국과 연합국들은 한국이 자주 독립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남북을 분할하여 신탁통치를 하게 되었다.
1.2. 해방 직후 국내외 상황
1.2.1.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세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일제의 패망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이 컸지만, 남북한에서는 서로 다른 정세가 전개되었다.
먼저 남한의 상황을 살펴보면,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 좌우익 세력이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였고,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로 개편되었다. 건준은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치안대를 설치하고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조직하여 광복 후의 혼란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또한 1945년 9월 6일에는 전국 인민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2일 후인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이를 불법 조직으로 간주하며 모든 단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미군정은 일제의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고, 친일파와 같은 반민족적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통치 아래에서 혼란이 지속되었다.
한편 북한의 상황을 살펴보면, 소련군이 8월 21일 북한에 상륙하자 좌우익을 막론하고 어떤 특정 세력도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북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인민위원회에 행정권과 치안권을 이양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후 소련군의 철수와 더불어 북한 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결국 해방 직후 남북한은 서로 다른 정세를 보였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통치 아래 혼란이 지속되었고,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
1.2.2. 미·소군정의 실시
일제의 패망이 뚜렷해지자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한반도 통치권을 두고 벌어진 미국과 소련의 경쟁의 결과였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분할 점령에 대해 1945년 8월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하였다. 미국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소련은 북부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남한을 점령하였고, 소련군은 8월 21일 북한에 진주하였다.
미군정은 한반도 남부의 치안유지와 행정업무를 맡게 되었다. 미군정은 당시 한반도에 존...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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