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세운상가 답사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청계천 답사 보고서
1.1. 답사의 동기와 과정
1.2. 청계천의 역사
1.2.1. 과거의 청계천
1.2.2. 청계천 복개사업의 흐름
1.2.3. 청계천 복원사업계획의 대두
1.3. 청계천의 위상
1.3.1. 풍수지리학적 위상
1.3.2. 사회경제적 위상
1.3.3. 문화적 위상
1.3.4. 환경적 위상
1.4. 청계천 복원사업의 이유
1.4.1. 안전의 측면
1.4.2. 환경의 측면
1.4.3. 문화적 측면
1.4.4. 경제적 측면
1.5. 청계천 복원사업의 계획
1.5.1. 기본방향
1.5.2. 사업기간 및 범위
1.5.3. 사업비
1.6. 청계천 복원사업의 영향
1.6.1. 안전의 측면
1.6.2. 환경의 측면
1.6.3. 문화적 측면
1.6.4. 경제적 측면
1.7. 청계천 복원사업의 문제점
1.7.1. 교통대책 문제
1.7.2. 주변 상인들과의 협의 문제
1.7.3. 환경 및 생태 문제
1.7.4. 역사 및 문화재 복원 문제
1.7.5. 주변 재개발 문제
1.8. 청계천의 앞으로의 발전 방안
2. 서울 광장의 조성과 변화
2.1. 서울 광장의 역사
2.2. 서울 광장 조성 사업의 이유
2.2.1. 교통체계의 개선
2.2.2. 역사성 및 상징성 회복
2.2.3. 보행 환경 개선
2.3. 서울 광장 조성 사업의 계획
2.4. 서울 광장 조성 이후의 변화
2.5. 서울 광장 조성 사업의 문제점
3.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청계천 답사 보고서
1.1. 답사의 동기와 과정
이번 청계천 답사는 동대문에서 출발해 청계천을 따라 경복궁까지 이르는 지역의 관찰을 통해 청계천 복원을 통한 그 지역의 주변환경, 상권의 변화 등을 알아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답사에 앞서 청계천 복원 후 약 두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직접 방문해 보지 않았고, 주변 지역에 대해서도 자세히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답사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또한 자연 지형의 답사가 아닌 도심 속 일상적인 장소를 돌아보고, 최근 활발히 이슈화되고 있는 곳을 답사한다는 점에서 마치 소풍을 가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이 있었다. 답사는 조별로 이루어졌으며, 미리 정해진 조와 조교 한 명이 함께 움직였다. 조교는 답사 중간중간 청계천과 주변 지역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여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지리학과 4학년 학생으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청계천의 역사와 복원과정, 주변 지역의 변화 등을 깊이 있게 설명해주었다. 답사를 통해 청계천의 아름다운 풍경과 다양한 역사, 문화, 경제적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1.2. 청계천의 역사
1.2.1. 과거의 청계천
과거의 청계천은 조선시대 개천(開川)으로 부르던 하천으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동대문 남쪽 오간수문을 빠져 나가서 중랑천(仲郞川)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연장 10.92km의 도시 하천이었다. 청계천은 원래 본류 지류의 구별 없이 모두 합쳐 청풍계천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1910년대에 청계천이라 불리게 되었다.
청계천은 조선시대 내내 수해가 잦았던 문제점으로 인해 개천공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태종 12년(1412)에는 개천도감(開川都監)을 두어 청계천 준설공사를 시작하였지만, 풍수지리상 불가하다는 상소에 따라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나 영조 때에는 개천에 매몰된 토사의 높이가 양쪽 도로와 같은 높이에 달해 비가 오면 탁수가 온 장안에 넘치게 되어 준설을 단행했다. 이 시기부터 청계천을 개천(開川)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역시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의 정비에 힘썼는데,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켜 도심의 홍수를 예방하려 했다. 이후에도 영조 때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는 등 대대로 청계천 준설사업은 계속되었다.
청계천에서 파낸 토사는 오랫동안 양안에 방치되어 점점 높아졌고, 이로 인해 동대문 부근에서 방산시장 부근까지 연속된 작은 구릉이 형성되었다. 이 부근을 조산동(造山洞)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1914년에 방산동(芳山洞)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청계천에는 많은 다리가 있었는데, 금천교, 혜정교, 모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영풍교, 태평교(마전교) 등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생계를 위해 농촌을 떠나 서울로 몰려든 도시 빈민층이 청계천 제방을 중심으로 무허가 건물을 짓고 생활하면서 하천의 오염과 위생 문제가 심각해졌다. 일제는 이후 청계천을 하수도 기능으로 전락시키고, 홍수로부터 일본인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1918년부터 청계천 준설작업에 착수했다.
1.2.2. 청계천 복개사업의 흐름
청계천 복개사업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청계천의 복개 계획은 대한제국기인 1895년 내부령 제9호로 종로 가가의 철거와 도로 확장 계획이 발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909년에는 황토형 절개공사로 얻어진 토사를 이용하여 황토현 구간 일부를 메운 적이 있었으나, 이것이 청계천의 본격적인 복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청계천을 복개하여 그 터를 이용하려는 계획은 1926년에도 수립되었는데, 대광교에서 주교정까지를 철근 콘크리트로 덮어 1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이곳에 택지와 상가, 위락시설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청계천을 복개할 경우 홍수 시 배수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기각되었다.
청계천 처리 문제가 본격적으로 고려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이후였다.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설정하고 경성을 그 중심에 놓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른바 '대경성 계획'이라는 것이었는데, 1934년의 시가지 계획령을 계기로 서울의 전반적 개조에 대한 구상이 본격화되었다. 청계천의 전면 복개 구상은 1935년 최초로 발표되었다. 당시 경성부의 마치다 토목과장은 청계천을 전면 복개하여 도로로 만들고 그 위로 고가철도를 놓는 구상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광교와 삼각정 사이를 우선 복개한다는 안이 마련되어 1937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광화문 우체국-삼각정 간을 복개하고자 하였다. 이와 동시에 1939년에는 복개 후 청계천을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들려는 안이 마련되었다. 또한 1942년부터는 삼각정 동쪽 지역의 청계천을 개수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청계천의 전면 복개안은 1940년 일제가 확정해 놓은 것이었지만, 전쟁에 쫓기던 일본이 이를 완수하기란 불가능했다. 일제가 지배하던 기간 중에 복개된 구간은 광화문사거리에서 광통교까지의 구간에 불과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는 정치적 혼란기로 건설 전반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1949년에 광교에서 영미교까지 연장 13Km를 3개 공구로 분할하여 9월 30일 동시에 하도 개수공사를 착수하였으며, 1950년 3월 중에 준설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건설사업이 중단되었다. 1954년에는 5,256만 환을 투입하여 청계천을 포함한 하수도 개수를 추진하였고, 1955년에는 광교 상류의 135.8m의 청계천 암거공사를 실시한 것이 첫 번째 복개공사였다. 이후 1958년 5월 25일에 착공하여 1961년 12월에 완공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다리(평화상가측)까지 2,358.5m, 폭 16∼54m의 청계천이 철근 콘크리트로 복개되었다. 이어 1965년부터 1966년까지 동대문의 오간수다리에서 제2청계교까지의 구간이 복개되었고,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8년에 완성되었다.
1.2.3. 청계천 복원사업계획의 대두
청계천 복원사업계획의 대두는 청계천을 자연하천으로 복원하려는 도시계획의 대두와 관련이 있다. 청계천은 조선시대 '개천(開川)'으로 불리던 하천으로, 서울의 중심부를 흐르던 중요한 하천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과정에서 청계천은 복개되어 도로와 고가도로로 변모하였다.
복개된 청계천은 그동안 도시개발의 상징이자 서울 도심의 중심 교통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청계천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의 노후화가 심각해졌고, 안전상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또한 도시민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친화적인 도시 공간에 대한 요구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청계천을 복원하여 도심의 친환경적 공간을 조성하고자 하는 계획이 제기되었다.
청계천 복원사업계획은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핵심 공약으로 등장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서울시장 후보였던 오세훈은 '청계천 복원'을 통해 도심 재생과 환경 개선을 내세웠고, 당선 이후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서울시는 청계천을 복원하여 도심의 역사성과 자연성을 되찾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며, 도심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복개되었던 청계천을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하고, 주변 지역의 재개발을 통해 새로운 도심 공간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청계천과 주변 역사문화자원을 연계하여 도심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서울의 대표적인 공간이자 문화관광자원으로 청계천을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청계천 복원사업계획은 도심의 환경개선, 역사문화자원 보존, 도시경제 활성화 등 다양한 목표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하천 복원을 넘어 서울의 새로운 도시 발전 모델을 제시하려는 포부를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3. 청계천의 위상
1.3.1. 풍수지리학적 위상
청계천은 서울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하천으로, 풍수지리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청계천은 다른 하천들과 달리 유일하게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이는 서울의 정기(精氣)가 동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청계천의 흐름이 중요했다. 특히 태종 때에는 풍수지리사들의 반대로 청계천 개천공사가 오랜 기간 지연되었다. 영조 때에는 청계천이 매몰되어 탁수가 범람하자 준설공사를 실시...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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