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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민족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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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민족의 발전"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국 근대사학사와 민족사학의 발전
1.1. 한말의 역사학 연구 동향
1.2. 일제강점기 역사학의 분화
1.2.1. 식민주의 사학
1.2.2. 민족주의 사학
1.2.3. 사회경제주의 사학
1.2.4. 실증주의 사학

2. 한국계몽주의와 민족교육
2.1. 한국계몽주의의 특성
2.2. 민족교육의 전개와 항일투쟁
2.3. 경술국치와 민족교육의 강화
2.4. 3·1운동과 민족교육의 성장
2.5. 일제군국주의의 전시체제와 민족교육의 항일투쟁

3.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한국 근대사학사와 민족사학의 발전
1.1. 한말의 역사학 연구 동향

조선 말기에 새로운 역사학이 태동되는 배경의 하나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뒷날 식민주의 역사학으로 발전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사 연구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연구는 이미 근대 이전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부터 이른바 국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古事記』, 『日本書紀』 등 일본의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을 신국(神國)으로 규정하면서, 과거 일본의 신이나 왕이 한국의 고대국가를 지배했고, 한국의 왕족과 귀족들이 일본에 복속했다는 등 한국의 일본 지배를 주장하였다. 이들이 조작해 낸 이러한 사상관은 이후 이른바 '정한론(征韓論)'과 메이지 시대 이후의 조선침략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이후 1883년 광개토대왕비의 조사와 더불어 일본학계에서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특히 일본 참모본부는 1883년 만주에서 탁본해 온 광개토왕비문을 검토하여 일본이 이미 한반도에 진출하고 있었음을 기정사실화하는 작업을 펼쳤던 것이다. 곧 광개토대왕릉 비문 연구의 주안은 신묘년 기사에 중점을 두어 고대 일본의 한국 출병과 지배를 입증하는데 두어졌다. 그 결과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는 학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광개토대왕릉 비문 연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질과 역사연구의 종속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1887년 일본 제국대학(帝國大學)에 사학과(史學科)가 설치되었으며, 1889년에는 국사과가 증설되었다. 이후 기관지로써 『史學會雜誌』가 간행되어(1892년 『史學雜誌』로 개명) 역사연구체제가 정비되면서 한국사에 대한 논문도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한국사에 대한 관심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는데, 이를 전후하여 한국사에 대한 단행본도 적지 않게 간행되었다. 하야시(林泰輔)의 『朝鮮史』(1892)와 요시다(吉田東伍)의 『日韓古史斷』(1893) 등이 출간되었다.

이같은 일본의 조선사 관계 책자들은 뒷날 현채(玄采)와 김택영(金澤榮)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특히 하야시의 저술은 1906년 현채(玄采)에 의해 중등교과동국사략(中等敎科東國史略) 으로 역술되며서 한말 사학이 일제 식민사학에 본격적으로 함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폐해는 매우 크다. 또한 1902년에 김택영이 저술한 동사집략(東史輯略) (1905년에 歷史輯略 으로 증보) 역시 일본인 사서의 영향으로 임나일본부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바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 시작된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는 점차 근대사·사회경제사 분야의 연구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는 이전에는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한 명분을 찾는 단계에서 조선을 강점하기 위한 실질적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들의 한국사 연구도 이러한 변화에 보조를 맞추었던 것이다.


1.2. 일제강점기 역사학의 분화
1.2.1. 식민주의 사학

1910년 한일병합과 더불어 일제에 의한 식민주의 사학은 본격적으로 심화, 확대되어 갔다.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조선총독부가 식민정책적 차원에서 식민사학을 직접 주도하게 되었다. 즉 종래에는 침략을 위한 이론적 도구로 기능을 하였던 식민사학이었지만, 이제는 병합을 합리화하는 역사서술이 필요하여 총독부에서 식민정책에 부응하는 사서의 편찬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인의 연구방법을 이용하면서 한국의 역사 · 지리 · 법제 · 풍속 등을 연구하였다. 일제는 1915년 7월부터 총독부 중추원에 편찬과(編纂科)를 두어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편찬에 나섰다. 이는 용어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사의 성격을 반도사로 축소시키고 있으며, 편찬의 목적을 "민심 훈육을 통하여 조선인을 忠良한 제국신민으로 만들어 조선인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는 그들의 표방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또한 박은식의 『韓國痛史』와 같은 한국사학의 성장을 봉쇄한다는 의미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 뒤 중추원에서는 조선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이 때는 한국인 찬의(贊議), 부찬의(副贊議)들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일본학자들을 동원하여 『반도사』 각 편의 집필을 담당하게 하는 등 편찬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3·1운동에 큰 충격을 받은 일제가 1922년 조선총독부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반도사 편찬사업은 일단 중지되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바뀌어 10개년간에 걸쳐 조선사를 완성한다는 계획을 세워 실행에 들어갔다. 『조선사』의 편찬을 통해 일제가 의도하였던 것은 한국인의 역사연구를 식민사학으로 유도하고, 이를 통해 식민사학을 체계화 하는 한편, 이후 식민사학의 성장을 위한 토대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학의 연구기반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사편수회와 함께 일제침략을 합리화하는데 주력한 기관이 식민지의 최고 학술기관인 경성제국대학이었다. 1926년에 이 대학에 법문학부가 개설되면서 이곳은 조선사편수회와 함께 일본인들이 조선사를 서술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편수회는 기초 자료의 정리·제공과 식민사학의 대중화라는 기능을 담당하고, 경성제국대학은 식민사학의 논저를 양상해내는 두 개의 축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기본 구도속에서도 편수회가 연구기관으로써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이는 편수회원들은 중심으로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는 '조선사학동고회(朝鮮史學同攷會)'가 결성되어, 1926년에 『조선사학』을 월간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편수회 안에 1925년 사담회(史談會), 그리고 1930년 정양회(貞陽會)라는 연구조직이 있...


참고 자료

조동걸 저,『한국계몽주의와 민족교육』 (우사조동걸저술전집 05), 역사공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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