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이태석신부 한센병 신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이태석 신부의 생애와 업적
1.1. 이태석 신부의 생애
1.2. 이태석 신부의 주요 활동
1.3. 이태석 신부의 삶과 유산
2. 이태석 신부의 추구한 성공과 행복
2.1. 이태석 신부가 추구한 성공의 의미
2.2. 이태석 신부의 행복관
2.3. 이태석 신부의 생애에 대한 분석
3. 소명의식과 성공, 행복의 의미
3.1. 소명의식의 의미
3.2. 소명의식과 성공, 행복의 관계
3.3. 이태석 신부의 소명의식과 그 영향
4. 이태석 신부의 완벽 리더십
4.1. 이태석 신부의 리더십 특성
4.2. 이태석 신부의 변혁적 리더십
4.3. 이태석 신부의 리더십의 영향
5.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이태석 신부의 생애와 업적
1.1. 이태석 신부의 생애
이태석 신부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에서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공부를 잘하는 다재다능한 소년이었다.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사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살레시오회에 입회한 뒤 광주가톨릭대와 로마 살레시오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였고, 2000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 살레시오회 소속 한국인 신부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수단에 파견되었다.
수단에 도착한 이태석 신부가 목격한 상황은 열악했다. 오랜 내전으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하루 한 끼를 먹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치료할 곳도 없었다. 이태석 신부는 이러한 상황을 보며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고통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이태석 신부는 수단에서 신부이자 의사로서 활동하며 하루 평균 15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고 돌보았다. 멀리 사는 환자들을 위해 직접 이동 진료도 나섰다. 또한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한센병 환자들의 발바닥 상처를 직접 돌보고 맞춤 신발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태석 신부는 음악을 좋아했기에 전쟁과 가족의 죽음으로 웃음을 잃은 아이들을 위해 직접 지휘자가 되어 악기를 가르치고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태석 신부는 수단에서 신부이자, 의사이자, 선생님이자, 건축가이자, 지휘자로서 겸비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08년 10월 한국에 왔다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1년간의 투병 끝에 2010년 1월 14일 선종하였다.
1.2. 이태석 신부의 주요 활동
이태석 신부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 수단에 도착하여 너무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신부이자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하루 평균 15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고 돌보았다. 뿐만 아니라 너무 멀어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직접 이동 진료를 나서기도 했다. 이후 이태석 신부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선생님으로 역할 하기도 했다. 또한 한센병 환자들의 발바닥 살점이 뜯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직접 그들의 발바닥을 그려 맞춤형 신발을 구해주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이태석 신부는 전쟁과 가족의 죽음으로 웃음을 잃은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자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태석 신부는 수단에서 신부이자, 의사이자, 선생님이자, 건축가이자, 지휘자로서 도무지 한 사람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해냈다."
1.3. 이태석 신부의 삶과 유산
이태석 신부의 삶과 유산은 그의 생애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태석 신부는 1962년 가난한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이태석 신부는 병원 원장의 추천으로 의대에 입학하였고, 이후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200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이태석 신부는 이듬해 아프리카 수단으로 파견되어 의사와 사제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태석 신부는 수단에 도착한 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치료와 교육, 문화 활동 등 다양한 방면에서 현지인들을 돌보며 삶을 바쳤다. 하루 평균 15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했으며, 소년병들에게 음악 교육을 실시하여 그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였다. 또한 한센병 환자들의 발을 보살펴 맞춤형 신발을 만들어주는 등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인 삶은 "수단의 슈바이처"라는 찬사를 받으며 현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태석 신부의 삶과 업적은 그의 선종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의 제자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이태석 재단에 따르면 이태석 신부가 세운 톤즈 돈보스코 학교 출신 의사가 2명이 되었고, 현재 의대에 재학 중인 학생이 45명에 이른다. 이들은 이태석 신부가 보여준 삶의 모범을 따라 자신들도 의료봉사를 실천하며 수단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그 ...
참고 자료
이지연. ‘한국의 슈바이처’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의 생애. 가톨릭신문, 2010. 1. 24일자박민정.
이태석 신부 따라 한국 온 남수단 제자 둘, 모두 의사됐다. 한국일보, 2020. 1. 22일자.
김백상. 故 이태석 신부의 힘, 남수단 제자 47명 의사·의대생. 부산일보, 2020. 6. 30일자.
이은지, “이태석 신부님, 저 한국서 의사 됐어요”, 중앙일보, 2020년 1월 23일,
https://news.joins.com/article/23688801
울지마 톤즈
다큐멘터리. 한국 91 분. 개봉 2010.09.09
감독: 구수환
나레이션: 이금희, 주연: 이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