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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수광과 지봉유설
1.1. 이수광의 생애와 업적
이수광은 조선 중기의 관리이자 학자였다. 그의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윤경, 호는 지봉이었다. 이수광의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희검이었고, 어머니는 문화 유씨였다. 이수광은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20세에는 진사가 되었다. 23세 때인 1585년(선조 18)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로 벼슬길에 나섰다.
27세 때에는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성절사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에는 30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종사관으로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용인 전투에서 패하였다. 이후 의주로 돌아가 북도 선유어사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활동에 공을 세웠다.
35세 때인 1597년에 그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바로 이 해에 정유재란과 함께 또 명나라 연경에서는 궁전이 불타는 사건이 일어나자 진위사가 되어 두 번째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때 그는 연경에서 안남 사신을 만나 교유하였다. 그 후 그는 39세에 부제학으로서 고경주역을 교정하였고 또 그 이듬해 주역언해를 교정하였으며, 41세에는 사기를 교정하였다.
광해군에 의한 인목대비 폐모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1616년(광해군 8)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관으로 나가 지방행정에만 전념하였는데, 특히 57세 때부터는 수원에서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인조 1)의 인조반정 이후 이수광은 도승지 겸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아울러 대사간, 이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수광은 이괄의 난을 맞아 인조를 공주로 모셨으며, 곧이은 정묘호란에는 왕을 강화로 모셨다. 1625년(인조 3)에 그는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에 응하여 조진무실차자를 지어 당시의 시정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66세 때인 1628년(인조 6) 7월에 그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이수광은 실학의 선구자로서 외침과 내분으로 나라가 어려웠던 시기에 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에 서서 양식있는 관료이자 성실한 선비로서의 자세를 끝까지 지켰다. [1,2,3]
1.2. 지봉유설의 편찬 배경
이수광은 17세기 초 조선 중기에 활동하였던 관료이자 학자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전란을 겪으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새로운 사상의 전개를 모색하는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외국 문물에 대한 관심과 개방적 태도로 정평이 나있었다.
이수광은 세 차례에 걸쳐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이 과정에서 축적한 폭넓은 견문을 토대로 1614년에 지봉유설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로 평가받는다. 이수광은 자신의 서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의의 나라로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