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간호역사
1.1. 조선시대 간호
1.1.1. 조선시대의 간호상황
조선시대의 간호상황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의료제도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하였다. 태종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직업교육과 전문교육을 실시하여 의녀제도를 창설하였다. 이를 통해 여성 환자가 생길 경우 남자 의원이 직접 진찰하고 치료할 수 없는 불편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세종 때에는 지방출신의 의녀가 한양에서 교육을 받고 지방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의녀제도를 확대하였다. 의녀는 진맥, 침구 등 질병에 대한 치료술을 익히고, 방서, 진맥, 명약 등을 배웠으며, 산서를 익혀 여성의 해산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의녀는 왕족이나 사대부 집안의 여성을 대상으로 의료행위를 시행하였고, 질병의 예후관찰 및 사대부 여성들의 범죄 수색과 혼수 사치 여부를 검사하는 등의 감찰업무도 수행하였다. 의녀양성교육은 제생원과 혜민서에서 담당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전통적인 간호와 돌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으나 공식적으로 간호인력을 양성한 기록은 없었다.
1.1.2. 의녀제도
의녀제도는 조선시대의 남녀유별이란 엄한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여성 환자가 생겼을 경우에 남자의원이 여성을 직접 진찰하고 치료할 수 없는 불편을 덜기 위해 생긴 제도이다. 태종은 태종 6년에 의녀제도를 신설하였고, 재생원에서 의녀를 양성하였다. 이때의 의녀는 모두 한양의 관비로, 이들의 활동무대가 주로 한양이었다. 세종은 세종 17년에 지방출신의 의녀가 한양에서 교육을 받고 지방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의녀제도를 확대하였다. 의녀들은 진맥, 침구에 대해 가르침으로써 의녀에게 질병에 대한 상당한 치료술을 익히도록 하였다. 또한 방서, 진맥, 명약 등을 배우게 하였으며 산서를 익히게 하여 여성의 해산을 돕는 행위를 하도록 하였다. 의녀들은 왕족이나 사대부 집안의 여성을 대상으로 의료행위를 시행하였다. 의녀본연의 의무 외에도 질병의 예후관찰 및 사대부 여성들의 범죄 수색 및 혼수 사치 여부를 검사하도록 하는 감찰업무까지도 수행하였다. 의녀양성교육은 처음에 제생원에서 담당하다가 세조 6년에 제생원이 혜민서에 통합되면서 의녀교육도 함께 이관되었다. 이처럼 의녀제도는 조선시대 여성 환자들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여성의 전문적인 의료 역량을 육성하는 제도였다.
1.2. 구한말 간호의 교육과 발전
1.2.1. 간호교육기관의 개설
정동 보구여관에서는 1903년 12월 선교자이자 간호사인 애드먼즈가 간호사를 위한 정규 교육과정을 3년 과정으로 개설하여, 이는 한국 간호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초기에는 12시간 근무제로 강의와 실습을 병행하였고, 환자간호 이외의 시간에 수업이 이루어졌다. 1906년 1월 정동교회에서 최초의 가관식이 시행되었고, 1908년 정도교회에서 최초로 김마르다와 이그레스가 간호교육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세브란스병원에서는 1906년 9월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교육이념으로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가 창설되었고, 초대 교장으로 쉴즈가 임명되었다. 1906년 2명의 여성을 선발하여 교육을 시작하였고, 1908년 6월 5명의 학생들이 제1회 가관식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제1회 졸업생으로 김배세가 배출되었다.
대한의원에서는 '대한의원 관제'에 치료부, 교육부, 위생부 등 3부를 두어 위생, 의육, 치병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교육부에서는 의사, 약제사, 산파 및 간호부를 양성하였다. 1909년 대한의원 교육기능을 분리하여 대한의원 부속학교를 두었고, 1910년 2월 1일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규칙'을 제정하여 교육에 관한 제반사항을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산파과와 간호과를 분리하여 모집하고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였으며, 수학, 해부학, 생리학 등의 기본분야와 전공분야를 교육하였다. 당시 대한의원의 교육제도는 근대적 교육의 기회가 제한된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보기 드문 높은 수준의 전문 교육제도였다.
1.2.2. 간호활동과 전문적 조직체의 탄생
영국간호협회(BNA)를 조직한 펜위크는 간호사의 자격과 대우를 위한 면허제도 도입을 주장하였다. 그는 간호사를 독자적인 직업으로 인정받기 위해 조직적인 활동을 펼쳤다. 펜위크는 간호사 면허시험제도 실시와 간호사를 하나의 독립된 직업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30년간의 투쟁 끝에 1919년 간호사 면허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펜위크는 1926년 영국 간호사 전문학교를 설립하고 간호사 국가등록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처럼 펜위크는 간호사의 자격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면허제 도입을 주장하였고, 이를 통해 간호사가 독자적인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데 기여하였다.
1.3. 일제시대 간호의 교육과 발전
1.3.1. 간호교육의 변화
일본은 1911년 식민지 교육정책의 기본이 되는 '조선교육령'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에 치중하고 일본어 보급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사립학교규칙'을 발표하여 사립학교를 탄압하였다.
이에 따라 사립계 간호교육기관의 경우, 선교계 병원이 지역적으로 확대되면서 발전하였다. 1920년 간호사가 부족하여 간호사 양성이 시급해지자 조선총독부에서 간호사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교육령을 개정하였다. 1924년에는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최초로 선교계 간호교육기관으로 지정을 받았다.
한편, 국·공립계 간호교육기관의 경우,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의원관제'가 반포되면서 대한의원이 조선총독부의원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로 격하되었다. 부속의학강습소의 간호부과와 조산부과는 1912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28년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산파·간호부양성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간호사 수요가 늘어나면서 1922년 '조선총독부의원 및 도 자혜원 조산부 간호부양성규정'이 반포되어 정규교육을 통한 조산부와 간호부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일제시대에 간호교육기관의 변화가 있었으며, 선교계와 국·공립계 간호교육기관 모두 간호사 양성에 힘써왔다고 볼 수 있다.
1.3.2. 간호전문단체 조직과 제도의 변화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직 단체인 재선졸업간호부회가 1923년에 창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