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1.1. 한국연극사 개요
한국 연극은 오래전부터 전통적인 판소리, 무용, 음악, 창극 등의 공연예술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엽, 일본으로부터 신파극이 도입되며 한국 연극사의 주류가 변화하게 되었다. 신파극은 감상적 정조와 과장된 연기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연극 양식이었다. 1910년대 초반 일본에서 도입된 신파극은 점차 한국에 확대되어 나갔으며, 1910년대 중반부터 공연물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한국의 신파극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서로 비슷한 경로를 거치며 발전하였는데, 통속적인 윤리관과 권선징악적 교훈을 담고 있었다. 이후 1920년대에 이르면 신파극단들이 이전의 상투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당대의 현실을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이고 무대장치, 분장, 연기방식에서도 한국적인 방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신파극은 본질적으로 상업주의와 멜로드라마적 특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신파극의 전성기가 펼쳐졌는데, 이 시기의 신파극을 '고등신파극'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1940년대에 접어들며 일제의 연극 통제가 더욱 강화되면서 신파극은 정치적 선전과 목적을 위한 멜로드라마로 변질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영화와 방송매체의 발달로 인해 신파극이 쇠퇴하게 되었지만, 신파조의 흔적은 연극, 영화, 라디오 드라마,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에 스며들어 대중의 취향을 지속적으로 반영해 왔다.
1.2. 연극에 대한 대중의 관심 증대
연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증대하였다. 연극이 단순한 유희나 오락의 수준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계몽의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연극 단체들이 등장하여 계몽적 목적의 작품들을 공연하였고, 일반 대중들도 연극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신파극과 신극 등 새로운 연극 양식들이 등장하며 대중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연극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시대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부각되면서,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참여도 커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극에 대한 대중의 관심 증대는 한국 연극사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다.
1.3. 연극사 연구의 필요성
연극사 연구의 필요성이다. 연극은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예술 분야이므로 연극사 연구를 통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한국 연극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연극사 연구는 현대 연극의 배경과 전통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며, 이를 통해 미래 연극 발전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또한 연극사 연구는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전통 연희부터 근대 연극, 현대 연극에 이르는 다양한 공연 양식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연극이 한국 사회와 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연극사 연구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 연극의 발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미래 연극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신파극
2.1. 신파극의 개념과 특징
신파극의 개념과 특징이다. 신파극은 1910년대 초부터 1940년대 말까지 한국 신극사의 주류를 이루었던 연극 양식이다. 감상적 정조와 과장된 연기양식을 주조로 하는 극의 형태이다.
신파극은 1910년대에는 일본식 신파극만을 지칭하였으나, 점차 광복 전까지 널리 유행한 대중극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오늘날에는 신파조라는 이름으로 그 잔존 요소만이 남아 있다.
1910년대에는 주로 일본에서 수용되어 확대되었으며,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군사극이나 탐정극 등 자국에서 유행하던 장르들이 한국에 전파되었다. 강렬한 정서적 자극이 있는 무르녹은 연애나 엽기적인 사건 등을 내용으로 다루었으며, 주인공이 어려운 처지에 몰리다가 결국 행복을 찾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신파극의 특징은 일본 신파극과 유사한 것으로, 당시 한국 연극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2.2. 한국의 신파극 발전과정
1910년대 초부터 1940년대 말까지 신극사(新劇史)의 주류를 이루었던 연극 양식 중 하나가 바로 신파극이다. 신파극은 감상적 정조와 과장된 연기양식을 주조로 하는 극의 형태이다.
1910년대 초기에 일제히 나타난 신파극단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민중계몽'을 내세웠다. 이러한 점은 일본에서 신파극이 성립될 때 자유민권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내세웠던 표어와 같으며, 군사극(軍事劇)·탐정극(探偵劇)이 초기에 많이 공연된 것도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의 신파극이 군사극으로, 전시의 오락극으로 변모된 영향을 그대로 받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무르녹은 연애, 엽기적인 사건 등 강렬한 정서적 자극이 있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주인공이 어려운 처지에 몰려 관중의 눈물을 자아내다가 결국 행복을 찾는 권선징악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신파극은 1911년 11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에 의해 처음 공연되었다. 남대문 밖 어성좌(御成座)에서 공연된 작품은 일본의 <뱀의 집념 蛇の執念>을 번안한 <불효천벌 不孝天罰>이었다. 임성구의 첫 공연은 일본 신파극의 서투른 모방극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후 혁신단 초창기의 극장세(劇場稅)는 15원이었고, 관람료는 자리등급에 따라 10전·20전·30전이었으며 학생·소아·군인은 반액이었다. 배우에 대한 배당은 1등에 평균 80∼90전, 말석 배우로 4등 배당이 15∼16전 정도였는데, 당시 쌀 한 되 값은 15전이었다.
1910년대 중반부터 1919년까지 약 10년 동안 부침(浮沈)하면서 공연활동을 벌인 신파극단은 대략 20여 개나 된다. 이들 20여 개의 극단에서 1910년대에 공연한 작품의 수효는 100여 편이 넘는다. 당시에 공연된 작품들의 주제는 효도 권장·신교육 권장·미신 타파·계급 타파·적서차별 타파·충의 권장·배금주의 타파와 사랑과 복수, 고부간의 갈등, 자유결혼의 문제, 선악의 갈등 등으로 다양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파극단들은 기존의 상투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일본의 작품을 번안, 각색하던 것에서 벗어나 차츰 당대의 현실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바꾸었고 무대장치·분장·연기방식도 한국적인 방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이 점차 식민지 상황을 소재로 삼자 일제의 연극에 대한 통제와 단속도 한층 강화되었다.
1920년대에 활약한 신파극단에는 1920년의 조선문예단(朝鮮文藝團), 1921년의 예술협회(藝術協會), 1922년의 민중극단(民衆劇團), 1926년의 조선극우회(朝鮮劇友會)·민립극단(民立劇團), 1927년의 산유화회(山有花會), 1928년의 화조회(火鳥會), 1929년의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 등이 있었다. 1920년대의 신파극은 1910년대와 구별하여 개량신파(改良新派)라 부르기도 한다.
1930년대에는 상업주의에 입각한 제작을 시도하여 흥행에 성공한 시기였다. 동양극장은 전속극단인 청춘좌(靑春座)와 호화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