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흥선대원군 쇄국정책반대의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1.1. 흥선대원군 선정 이유
1.2.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국내 상황
1.3.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국외 상황
2. 본론
2.1. 흥선대원군의 내정개혁
2.1.1. 정치제도 재정비 및 군사제도 개혁
2.1.2. 경복궁 재건
2.1.3. 인재 등용 및 문벌 타파
2.1.4. 서원 철폐
2.1.5. 3정(전정, 군정, 환정)의 개혁
2.1.6. 통치 규범 정비
2.1.7. 신식무기 개발
2.2.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치
2.2.1. 병인박해
2.2.2. 제너럴 셔먼호 사건
2.2.3. 병인양요
2.2.4. 오페르트 도굴 사건
2.2.5. 신미양요
2.2.6. 척화비 건립
2.3. 흥선대원군에 관한 기존의 평가
2.3.1. 1960년대~1980년대
2.3.2. 1990년대
2.3.3. 2000년대~최근
3. 결론
3.1. 흥선대원군에 관한 재평가
3.1.1.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 해석
3.1.2. '쇄국'이란 용어의 기원
3.1.3. 흥선대원군 대외정책의 성격
3.1.4. 개방의 속도와 시기에 대한 고민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1.1. 흥선대원군 선정 이유
흥선대원군은 우리나라 역사 속 대표적인 인물이자, 근대 시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첫째, 교과서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업적과 영향력을 재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 외국과의 통상과 수교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흥선대원군은 이 부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핵심 인물이다. 셋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긍정적 및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로, 기존 평가에 영향받지 않고 스스로 재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1.2.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국내 상황
19세기 조선은 외부로부터 정치, 문화적으로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근대로 접어드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왕은 인사권과 군권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해 위상이 낮아졌고, 세도가문과 규장각 출신의 노론계열, 일부 소론계열의 실무관료 가문이 실권을 차지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저항운동인 병란, 민란이 활발하게 일어나 '민란의 시대'로 불렸다.
사상적으로는 조선이 충, 효를 중시하는 주자 성리학을 존중하고 수용하였으나, 천주교 신도들이 늘어나고 정약용, 김정희와 같은 실학자들이 등장하며 근대적 정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양선 출몰 등의 사태를 국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아 쇄국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19세기 조선은 사상 도고들의 독점적 자유주의 상업의 성장으로 근대 조건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국가 권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또한 인구 감소와 노동자 실질 임금의 하락, 토지생산성의 지속적 하락, 쌀값의 상승, 농촌 장시의 숫자 감소, 환곡제도의 해체 등으로 전반적인 시장경제가 위축되었다.
종합해보면 조선 후기는 외부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며 근대로 접어드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왕권이 약화되고 세도정치가 만연했으며, 사상적으로는 유교와 서양 사상이 충돌하는 가운데 근대적 변화가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는 성장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나 제도적 한계로 인해 침체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국내 상황 속에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게 되었다.
1.3.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국외 상황
당시 힘이 지배하는 냉엄한 국제 현실 속에서 개방은 시대의 대세로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청은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에 개항하였고, 일본은 미국 동인도함대 제독 페리의 무력시위를 통해 미국에 개항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은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앞세워 강제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개항시키고 있었다.
어느 시대나 약자가 강자에게 지배당하듯이, 당시 국제관계에서도 힘의 논리가 지배했다. 서구 열강들은 병력과 무기력을 앞세워 동양의 국가들을 개항시키고 있었고, 이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냉혹한 현실에서 조선은 전통적인 쇄국정책을 고집할 수 없었다. 열강들의 끊임없는 압박과 침략 앞에 개방의 대세에 역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은 강제적인 개항 요구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의 국외 상황이었다. 강대국의 군사력에 밀려 부득이하게 개항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당시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엄한 상황이었으며, 이에 대한 대응이 흥선대원군의 가장 큰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2. 본론
2.1. 흥선대원군의 내정개혁
2.1.1. 정치제도 재정비 및 군사제도 개혁
비변사 혁파, 삼군부 설치
조선 후기 비변사는 세도정치의 최고 권력 기구로 국가 재정과 군사력을 통솔하고, 주요 관직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비변사가 존재하는 한 무부를 독립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비변사를 의정부로 바꾸어 행정 기능을 담당하게 하고, 군사 기능은 삼군부로 독립시켜 상설적인 최고 군령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세도정치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했다. 또한 6조 기능을 부활시켜 통치체제를 국왕 중심으로 재정비하였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은 기존 비변사 체제를 해체하고 삼군부를 신설하여 군사 기능을 독립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과 군사를 분리하여 국가의 통치 체제를 재편성하고자 하였다. 이는 세도정치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흥선대원군의 내정개혁 정책의 일환이었다.
2.1.2. 경복궁 재건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복궁 재건을 위해 원납전과 당백전을 발행하였다. 원납전과 당백전의 발행은 경제 질서를 일부 왜곡하여 재정상의 문제점을 초래하였으나, 경복궁의 재건을 통해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조선 왕조의 중흥을 과시할 수 있었다. 경복궁 재건은 흥선대원군의 주요 업적 중 하나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왕궁을 복원하여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원납전과 당백전 발행 등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경복궁 중건 공사를 완료하여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2.1.3. 인재 등용 및 문벌 타파
흥선대원군은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이는 인재 등용이라는 명분으로 약 60년 동안 권력을 독점한 노론계열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정치를 척결하고, 정권 구조의 재편을 통한 대원군의 사조직 강화, 외척 세력의 견제가 목적이었다.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계열은 19세기 조선 후기에 약 60년 간 권력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를 실시했다. 이들은 매관매직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고, 비변사를 장악하여 국정을 좌우했다. 이로 인해 왕권은 약화되었고,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세도정치의 폐단을 타파하고자 했다. 그는 문벌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정권 구조를 재편했다. 이를 통해 안동 김씨 가문의 세...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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