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현문사 간호학개론
조선시대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히 제한되어 가족과 이웃을 돌보는 수준에서 간호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가정과 이웃을 벗어나 타인의 간호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간호직명은 간호원(1903), 간호부(1914), 간호원(1951), 간호사(1987)로 변경되었다.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의료제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노비들이 양반의 신분을 얻게 되면서 건강장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건강보호에 적극성을 띠었다. 둘째,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에 비해 과학기술과 의약기술이 발전하였으며, 특히 1446년 훈민정음 반포로 민중들이 쉽게 의약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중앙 집권적 보건의료체제를 강화하고 유교를 신봉하여 태조 원년에 전의감, 혜민국, 동서대비원을 설치하였고, 태종 6년에 제생원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간호는 가족구성원의 건강관리, 병자를 돕고, 간호와 물리치료, 응급치료 제공 등 비공식적인 의료활동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의녀제도가 1406년 태종 6년에 최초로 설치되었는데, 이는 관비(천민) 중 12세 이상 30세 이하의 건강한 동녀를 선발하여 진찰, 침구, 명약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남녀유별의 한계를 극복하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간호교육과 질 관리가 이루어졌다.개항기 간호는 1876년 조일수호조약 체결 이후 이루어졌다. 1878년 부산에 재생병원이 설립되어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되었으며, 1881년 원산 생성의원, 1884년 인천 영사관부속의원이 설립되었다. 또한 1885년 4월 15일 제동에 왕립병원인 '널리 은혜를 베푸는집' 광혜원이 개원되었고, 2주 후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개칭되었다.
제중원은 선교사 의사 알렌부부가 1884년 조선에 왔고, 1885년 5명의 여자의학생을 선발하여 4개월 간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후 1891년 영국 히드코트가 최초의 서양 선교간호사로 파견되었고, 1892년 여의사 쿠크와 히드코트가 성베드로병원을 개설하였다. 또한 1906년 쉴즈가 세브란스 간호양성소를 설립하여 나이팅게일식 간호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 일본은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후 개항지에 병원을 설립하여 서양의술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1878년 부산 제생병원, 1881년 원산병원, 1884년 인천 영사관부속의원 등이 설립되었다. 이들 병원은 최신 설비와 기구를 갖추고 있었지만, 일본인 의사와 간호부가 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간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한편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군국기무처가 창설되면서 봉건적 의료관료제가 폐지되고 새로운 보건행정체계가 마련되었다. 이를 통해 시대적 과제에 따라 서구의 보건의료와 의학이 도입되었고, 제중원이 내무아문에 소속되면서 서양의료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조선시대 간호
2.1. 사회상과 의료제도
노비들이 양반의 신분을 얻게되면서 건강장수에 대한 염원이 커지고 건강보호에 적극성을 띠었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에 비해 과학기술과 의약기술이 현저하게 발전하였는데, 특히 1446년 훈민정음 반포로 민중들이 쉽게 볼 수 있는 한글로 주석을 단 의약책을 펴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평범한 민중들도 의약기술과 지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조선은 중앙 집권적 보건의료체제를 강화하고 권력 유지를 위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신봉하였으며, 태조 원년에 전의감, 혜민국, 동서대비원 등 4개의 의료기관을 설치하였다. 태종 6년에 제생원을 설치하고 의녀제도가 시작되었으며, 세조 12년에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활인원 등 4개의 의료기관으로 정비되어 조선말까지 지속되었다. 조선말까지 여성의 사회활동이 제한되어 가족과 이웃을 돌보는 수준에서 간호가 이루어졌으며, 의녀제도를 통해 관비 천민 여성을 선발하여 체계적으로 교육하여 여성 환자 치료에 기여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사회계층의 변화, 과학기술 및 의약기술의 발전, 중앙 집권적 보건의료체제 구축, 여성의 사회활동 제한과 의녀제도 운영 등의 사회상과 의료제도 변화가 있었다.
2.2. 간호
조선시대부터 가정과 이웃을 벗어나 타인의 간호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 직업적 간호가 도입된 이래 간호직명은 간호원(1903년 에드먼드), 간호부(1914년), 간호원(1951년), 간호사(1987년)로 변경되었다. 조선시대의 간호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주로 가족 구성원 건강관리, 병자 돌보기, 간호와 물리치료, 응급치료제공 등의 비공식적인 의료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녀제도는 태종 6년(1406년)에 민중의 질병치료와 구호활동을 주 업무로 하는 제생원에 설치되었다. 의녀는 천민 신분의 여성으로 12세 이상 30세 이하 연령의 건강한 동녀를 선발하여 교육하였다. 의녀의 주요 업무는 간호, 조산, 진찰, 침구, 명약 등이었으며, 왕족과 사대부 집안 여성 대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의녀제도는 태종, 세종, 성종의 3대에 걸쳐 확립되었으며, 연산군 때부터 변질되어 감찰 업무와 술시중 등 간호 이외의 업무가 부여되면서 의녀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졌다.
개항기 간호에서는 선교사들에 의해 간호 교육이 시작되었다. 1902년 캐나다 출신 에드먼드가 '보구녀관'을 설립하여 '간호원'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1906년 쉴즈가 '재조선졸업간호부회'를 조직하여 간호사 협회가 출범하였다. 1907년 대한의원에서 산파와 간호부를 양성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 주도 간호교육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전국 13개 도청 소재지마다 자혜의원을 설치하고 간호부와 산파 교육기관을 운영하였다. 1922년 간호부규칙이 개정되면서 간호교육의 입학자격 및 교육과정이 일본과 동일한 수준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1930년대에는 간호인력 부족 해결을 위해 지방 공립학교의 간호교육 확대, 사립학교 인가 증가 등의 정책이 추진되었다. 1944년에는 일반 여자고등학교에 간호부과가 신설되면서 간호교육이 크게 확대되었다. 간호면허제도는 1914년 간호부규칙과 산파규칙 제정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계속 강화되어 1942년에는 남양군도까지 간호부 면허 취득 범위가 확대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기에는 간호사업국이 간호사업과로 축소되었고, 간호부 자격 검정고시제가 1948년부터 폐지되기 시작하였다. 1948년 8월에는 육군 간호장교단이 창설되었으며, 대한간호협회가 1946년 조선간호협회로 출범하여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간호교육기관이 문을 닫고 간호사 부족 현상이 심각했지만, 우방국의 간호 인력 및 물자 지원으로 간호 활동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 후 복구기에는 미군정 시기에 도입된 3년제 간호교육제도가 발전하여 4년제 대학교육으로 확대되었다. 1954년에는 중앙간호연구원이 개설되어 간호교육자 양성에 힘썼으며, 1957년 대한간호협회가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어 활동을 활발히 하게 되었다.
간호성장기인 1960년대 이후에는 간호교육이 3년제에서 4년제로 발전하였고, 대학원 과정도 개설되었다. 1962년 의료법 개정으로 간호사 국가시험제도가 도입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간호협회와 간호학회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1980년대 이후에는 간호계 내외부의 변화와 발전이 지속되어 왔으며, 간호사의 역할과 직무가 더욱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었다.
2.3. 의녀제도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간호는 비공식적인 의료활동으로 가정 내와 이웃 간에 이루어졌다. 여성의 주된 역할이었던 간호는 자신의 가족 중에서도 주로 웃어른과 자녀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태종 6년(1406년)에 최초로 의녀제도가 민중의 질병치료와 구호활동을 주 업무로 하는 제생원에 설치되었다. 의녀는 관비(천민) 신분의 12세 이상 30세 이하의 건강한 동녀들로 선발되었다. 이는 남녀유별법에 얽매이지 않고 남성 의원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신분상 국가에서 인력수급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의녀들은 간호, 조산, 진찰, 침구, 명약 등 다양한 의료 행위를 담당하였다. 의녀제도는 태종, 세종, 성종의 3대를 거치며 체계적인 교육제도가 확립되었으며, 예문관과 문신들이 교수를 겸직하며 양성되었다. 의녀들은 우수한 일부에게 급료가 지급되기도 했으며, 간병 외에도 감찰 업무와 술시중 등 새로운 업무가 추가되었다. 이로 인해 의녀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고 간호사에 대한 이미지도 손상되었다.
3. 개항기 간호 (1876~1910)
3.1. 사회상과 의료제도
조선시대 의료제도와 사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