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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갑신정변과 조선의 대응
1.1. 갑신정변의 배경과 전개
갑신정변의 배경과 전개는 다음과 같다.
임오군란 이후 고종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때 개화정책을 둘러싸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온건파는 조선과 청나라의 사대관계를 주장하였지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의 급진 개화파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배격하고 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서양의 기술과 근대 사상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사이의 대립이 깊어지면서 정변을 계획하게 된다. 당시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베트남 문제를 두고 갈등이 발생하여 청나라가 조선 주둔 군대의 절반을 철수시켰다. 이를 기회로 본 급진 개화파는 1884년 10월 우정총국 건물 완공 연회를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군의 공격과 급진 개화파의 열세로 인해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간섭이 강해졌고, 일본의 내정간섭도 더해지면서 복잡한 국제정세에 휩싸이게 되었다.
1.2.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는 다음과 같다.
갑신정변은 조선 최초의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의의가 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의 급진개화세력은 유학 생활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물과 문명을 접하고, 조선도 근대국가로의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정변을 일으켰고,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이는 조선에서 최초로 근대화를 주도하고자 한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지나친 외세 의존과 기존 권력층을 배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한계를 지녔다.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일본에 차관을 요청하고 군대 개입을 요구하는 등 지나치게 외세에 의존하였다. 또한 민중에 대한 충분한 설득과 소통 없이 상층부의 권력 교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