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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상과 군장의 등장이 갖는 사회적 의미
1.1.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상
청동기 시대에도 신석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사냥, 어로, 채집 활동이 이루어졌지만, 경제의 중심은 농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는 보리, 밀, 콩, 기장, 조, 수수 등 다양한 곡물이 재배되었으며, 대전 괴정동에서 발견된 농경문 청동기에는 사람이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이용해 밭을 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한, 진주 대평리에서는 고랑과 이랑이 남아 있는 청동기 시대의 밭이 발견되어, 당시의 농경 방식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부여 송국리를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불에 탄 쌀과 볍씨 자국이 남은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논산 마전리와 울산 무거동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논이 발견되었다. 당시 논은 하천이나 계곡의 물을 활용할 수 있도록 간단한 보(洑) 같은 관개시설을 설치하여 조성되었으며, 사각형 혹은 불규칙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벼를 수확할 때는 반달돌칼이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벼농사가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동기 시대의 주식은 여전히 밭에서 재배된 기장, 조, 보리, 밀, 콩 등이었으며, 쌀은 부차적인 곡물로 소비되었다. 이와 함께 도토리와 같은 견과류도 채집하여 식량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로 바위에 그림을 새겼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 울주 반구대와 고령 장기리 알터바위 그림이 있다.
1.2. 군장의 등장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곡물의 파종과 재배, 수확을 위해 사람들이 한 지역에 장기간 정착하는 것이 필수적이 되었다.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에는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고, 정착 생활의 기간도 이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청동기의 사용으로 목제 및 석제 농기구가 더욱 정교하고 날카로워지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였고, 특히 벼농사의 확산이 이를 더욱 촉진하였다. 이로 인해 부족 내에서도 가족 간의 경제적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농업의 발달과 함께 청동기를 제작하는 장인, 무력을 행사하는 전사, 물품을 교환하는 상인 등 새로운 직업군이 등장하면서 사회적 분화가 가속화되었다.
농업 생산량 증가로 인구가 늘어나자, 경작지와 거주지를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씨족과 부족, 그리고 취락 간의 경쟁과 충돌이 점차 빈번해졌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방어시설을 갖춘 대규모 취락이 등장하였으며,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규모가 큰 취락이 주변의 작은 취락들을 통합하며 서열화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강한 부족이 약한 부족을 정복하면서 보다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갖춘 정치 조직이 형성되었고, 이를 이끄는 지도자를 '군장'이라 하였다. 군장이 사망하면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무덤이 조성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과 돌널무덤이다. 이 무덤에는 비파형 동검을 비롯한 다양한 껴묻거리가 함께 묻혔다.
이처럼 청동기 시대의 경제적 변화는 사회의 계층화를 초래하였으며, 이를 배경으로 군장이라는 지배층이 등장하여 보다 조직화된 정치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1.3. 청동기시대 경제생활의 변화상과 군장의 등장이 갖는 사회적 의미
청동기 시대에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경제 구조와 사회 질서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인구가 증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