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고려의 건국과 북진정책
1.1. 고려의 성립과 민족 재통일
고려는 태조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다. 태조는 고구려계 호족 세력의 지지를 받아 중부지방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고려를 세웠다. 고려 초기 고구려계 호족 세력들이 많은 활약을 하였는데, 이들은 왕건을 지지하면서 고구려의 정통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을 중요하게 여겼다. 태조는 평양을 북진정책의 기지로 삼았고, 평양 대도호를 고려의 수도 개경과 짝하는 서경이라 불렀다. 평양에는 정치·행정·군사·교육 등의 체제가 갖추어졌으며, 고구려의 제천 행사인 동맹을 계승한 팔관회가 매년 개최되었다. 이처럼 태조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며 평양을 중시하였다.
고구려계 호족 세력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궁예가 도참의 글이 새겨진 옛 거울을 얻은 일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도참에는 신라를 '닭'으로, 압록강을 '오리'로 비유하며 신라를 통합하여 압록강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고구려계 호족들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태조는 고구려의 정통을 잇고자 하며 평양 개척에 주력하였고, 고구려계 호족 세력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고려를 성립시켰다. 고려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하며 민족 재통일을 이루었다.
1.2. 태조의 평양 개척과 북진정책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은 초창기부터 평양 개척에 주력하였다. 그는 북진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북진정책의 기지로 삼았고, 훈요십조에서도 서경을 중시할 것을 명시하였다. 태조가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곳에 강한 힘을 가진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고구려계 호족들의 적극적 협조도 크게 작용하였다.
태조는 평양으로 백성을 옮겨 평양이 고려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대도호로 삼아 사촌 동생인 왕식렴을 보내 이를 지키게 하였다. 이후 평양 대도호는 고려 왕실의 정치적이면서도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태조는 평양 대도호를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짝하는 서경(西京)이라 불렀다. 거란의 침입 당시에도 서희는 거란의 장수인 소손녕과 담판할 때 고려의 수도를 평양이라고 칭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의 두 번째 도시인 서경에는 정치·행정·군사·교육 등의 체제가 갖춰지게 되었다. 서경에서는 고구려의 제천 행사인 동맹(東盟)을 계승하는 팔관회가 매년 10월에 개최되기도 하였다.
태조가 평양 개척과 북진정책에 주력했던 배경에는 그가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악군 출신인 태조 왕건은 중부지방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려를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계 호족 세력들의 지지를 받았다. 고려 초기에 활약한 고구려계 호족 세력들은 송악에 근거지를 둔 왕건을 지지하면서 고구려의 정통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1.3.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방 민족과의 관계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기본 인식을 가졌던 고려는 고구려 왕도 평양을 중시하였다.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고 평양을 자신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고려 초기에는 고구려계 호족 세력들이 왕건을 지지하면서 고려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정통을 잇고자 했던 태조의 의도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고구려계 호족 세력들은 고구려의 영토 확장 의지를 이어받아 신라를 통합하고 압록강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는 왕창근의 도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먼저 닭을 잡은 뒤 오리를 잡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신라를 지칭하는 계림과 압록강을 의미하는 오리를 잡겠다는 뜻이다. 이를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