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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25전쟁과 북한의 대남도발
1.1. 6.25전쟁의 배경과 발발 원인
25전쟁의 배경과 발발 원인은 다음과 같다.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2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치 상태는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세력에 의한 전복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남침계획을 설명하고 전차 및 야포 등의 지원을 스탈린으로부터 받아냈고, 중공군에 편성된 한인 약 4개 사단의 병력을 북한군에 편입시킨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북한군은 6.25 발발 당시 소련제 전차 등 최신예 장비로 중무장되었고, 중국내전을 통해 전투경험이 축척된 막강한 전투인력을 확보했다. 그러므로 6.25전쟁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발발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치밀한 사전 준비에 의한 계획된 전쟁이었던 것이다.
1.2. 북한의 3일만에 서울 점령한 이유
북한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대규모 포사격을 시작으로 기습남침을 시작했다. 3단계로 계획된 전쟁전략에 따라 당시 최신무기였던 T-34 탱크 242대와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10개 사단이 밀려들어왔다. 당시 탱크 한 대도 없었던 국군은 육탄으로 탱크를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남한의 수도 서울을 3일 만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은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3일이라는 시간을 서울에서 지체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북한의 도하장비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국군이 서울을 지키기 위해 강렬히 저항하다가 철수할 때 한강다리를 폭파시켰는데, 보병과 탱크가 주력부대였던 북한은 한강을 도하하기 위한 장비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느라 지체가 되었다.
둘째, 김포전선에서의 강렬한 저항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서울로 향하는 주력부대 외에도 김포방향, 춘천방향으로 병력을 나누어 보냈는데, 김포전선에서 예상보다 강력한 저항을 받아 주력부대와의 합류가 늦어졌다.
셋째, 춘천방향으로 오던 북한군이 국군에 의해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기습이라는 전술로 자만해 있었는데, 국군은 이를 잘 파악하여 북한군이 더 큰 전술적 실수를 범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북한군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다. 이는 UN군과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우리군의 독자적인 전투로써 북한의 전쟁계획을 수정하게 만드는 큰 성과였다.
종합해보면, 북한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지만 도하장비 미비, 김포전선에서의 예상외 저항, 춘천방향에서의 국군 승리 등으로 인해 3일간 지체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3. 인천상륙작전의 성과와 의의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 초기 아군에 불리하게 전개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고, 총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이었다. 크로마이트(Chromite)로 알려진 이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8개국 함정 261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와 한미 해병·육군으로 편성된 7만5,000명의 상륙군이 참가했다. 이 규모는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혈투를 벌이며 싸우고 있는 아군 전력의 3분의 2에 해당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의 구상과 강력한 의지에 따라 결행되었으나, 그 성공의 이면에는 한국 해군의 공로가 숨겨져 있다. 당시 8월 12일 맥아더가 이 작전 계획을 최종 확정했지만, 한국 해군은 이보다 훨씬 앞서 작전을 전개했다.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제독은 8월 12일 미 극동사령부로부터 첩보수집 임무를 하달받고, 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