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책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박원순)'를 읽고 진행한 이 보고서 작성 활동은 '세기의 재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역사상 유명한 재판 사례들을 통해 사법 권력의 문제점과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재판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재판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의 동기 및 태도를 이해함으로써, 사법부의 공정성과 중립성이 훼손되고 결국 무고한 개인을 희생양으로 삼게 된 과정을 세부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각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고, 나아가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보고서 작성 활동을 통해 사법 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폐해를 이해하고, 법률과 재판이 지켜야 할 가치와 공정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세기의 재판과 그 주인공
2.1. 로젠버그 부부 사건
로젠버그 부부는 1915년과 1918년 각각 뉴욕에서 가난한 유대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1939년에 결혼하면서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이후 줄리어스는 육군 통신대에 민간인 직원으로 취직하였으나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1945년 해고당했다.
로젠버그 부부는 1950년 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는데, 이는 1942년부터 진행되어온 맨하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클라우스 푹스라는 독일출신 물리학자가 소련의 스파이로 밝혀진 이후 연쇄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클라우스 푹스의 연락책이었던 해리 골드는 또 다른 정보원이 있다고 자백했는데, 그가 바로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처남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였다.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는 1944년 로스앨러모스에서 근무하던 중 매형 줄리어스와 누나 에셀에게 원자폭탄 관련 정보를 누설했다고 자백하였고, 이에 따라 줄리어스와 에셀 로젠버그가 체포되었다. 로젠버그 부부는 혐의를 줄곧 부인하며 무고함을 주장했지만,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전기의자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당시 유명 지식인들이 로젠버그 부부의 무죄를 주장하며 그들의 구명을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사람은 처형당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증거들이 속속 밝혀지면서 로젠버그 부부가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였음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로젠버그 부부 사건은 국가안보와 개인의 인권이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2. 토마스 모어 사건
토마스 모어는 1478년 2월 7일 유명한 법학자였던 존 모어의 아들로 태어나기부터 총명했다. 13살이 되던 해에는 켄터베리 대주교이자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존 모튼의 집에서 시종 노릇을 하며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당대 잉글랜드의 가장 대표적인 유력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모튼은 재기가 넘쳐 보이던 모어를 무척 아꼈고, 모어가 르네상스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적극 지원해주었다. 모어가 법학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터라 1494년경 모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런던에서 코먼 로(보통법)를 공부했다.
1505년, 제인과 사랑에 빠진 모어는 수도사의 꿈도 버려두고 급하게 그녀와 결혼했다. 아직 어린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라틴어와 음악을 지도 받아 외국의 방문객들을 맞이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교양과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는 모어의 전성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1505년 모어는 스물일곱 살 때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동시에 헨리 7세의 가혹한 세금 부과안에 맞섰다. 이에 화가 난 헨리 7세는 모어의 아버지를 런던탑에 가두고, 모어에게는 벌금형을 부과했지만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던 모어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1511년 제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행복했던 그의 첫 번째 결혼생활은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모어는 아이들에게 좋은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곧 재혼했다. 모어의 두 번째 부인은 앨리스 미들턴이라는 부유한 미망인으로, 심지가 굳고, 야심이 컸다고 한다. 앨리스는 자신의 아이들은 물론 모어와 제인 사이에 3명의 여아와 1명의 남아를 무척 잘 키웠으며, 비록 행복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주도했다. 1529년, 그는 대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그의 인생이 절정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당시 집권한 헨리 8세는 점차 교황권을 부정하기 시작했고, 영국 교회의 수장이 자신임을 외치기 시작했다. 모어는 이에 침묵했으나 이 침묵은 강력한 '부정'을 의미했다. 1533년 모어가 앤 볼린의 왕비 대관식 참석을 거부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갈라졌으며, 모어의 정적들은 대관식 참석 거부를 빌미로 모어에 대한 모함을 늘어놓았고, 이러한 모함의 일환으로 모어는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체포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