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이미 프린켑스(시민 중의 제1인자)가 아니라 절대전제군주가 되었던 것이다. ... 그가 얻은 칭호는 아우구스투스와 프린켑스였기에 이 황제 제도는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원수정(元首政)]’라 불리게 되었다. ... 공화주의자로 자처한 그는 스스로 프린켑스(Princeps), 즉 제1시민 이라고 지칭했고 ‘존엄한 황제이고 신 같은 카이사르의 아들’이란 칭호보다 제1시민이라는 칭호를 더 좋아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독재의 의미가 내포되어있어 원로원과 민중에게 반발을 살 수 있으므로 제 1시민을 뜻하는 프린켑스의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 ... 이후, 카이사르의 양아들 중 한명인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하여 로마 사회를 통일하고 독재자가 되어 자신을 스스로 프린켑스로 칭하여 로마 사회 혼란 해결을 도모했다.
카이사르는 이 칭호를 한평생 사용했으며 또 아우구스투스는 원수(프린켑스)의 최고 권력을 나타내는 칭호로 하였다. ... 기원전 38년에 아그움의 소지자 즉 임페라토르가 그의 레가투스의 공적에 대해서 명예를 취해야만 한다는 원칙을 제시한 셈이고, 군사적 명예들이 후일 프린켑스 가문의 일원과 프로콘술의 ... T.몸젠은 이를 그 이후의 '전제군주정(도미나투스)'의 시대와 구분, 공화정 시대의 전통이 더욱 상대적으로 존중되었던 시대라고 하고, 프린키파투스를 원로원과 프린켑스가 이끄는 일종의
프린켑스는 아르메다. ... 프린켑스는 티베리우스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동방에서 곤란한 문제에 봉착해있었다. ... 프린켑스는 패배를 인정하고, 그의 은퇴를 원로원에 알렸다. 23) 티베리우스의 귀환(기원전 2년~서기 9년)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티베리우스의 은퇴에 분노를 품고 있었다.
BC 29년 로마로 개선한 옥타비아누스는 190명의 원로원 의원을 숙청하고 다음해 원로원의원 명부에 첫 번째에 이름을 등재하여 ‘제1의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 형식적으로 아우구스투스는 대외적으로 속주에 대한 통제권과 대내적으로는 호민관의 권한, 그리고 프린켑스라는 원로원의장격인 권위라는 공화정의 합헌적인 옷을 입고, 실질적으로는 황제로서
공을 세운 자에겐 훈장을 주었지만, 프린켑스의 위업을 어떤 식으로든 손상할 만한 개인적인 영광은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다. ... 프린켑스의 군사적 업적이 다른 원로원 의원들의 업적에 가려 빛을 잃어서는 절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제국의 추가적인 확장이 어려웠던 것이다. ... 트라야누스는 옵티무스 프린켑스, 즉 최고의 황제라고 기억되었다. 그는 원로원과의 관계도 좋았으며, 일생 중 많은 시간을 군대에서 보낸 황제였다.
누구든지 아우구스투스(프린켑스)의 허락을 받고서야 승진될 수 있었다. 도둑이나,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을 지켜줄 사람은 원로원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였다. ... 이후 제 1의 로마시민이라는 의미를 지닌 프린켑스(로마원로원의 대표자라는 뜻)라는 칭호를 사용, 이 때문에 초기 제정을 원수정(Principate)라 부른다.
그들의 여왕 칸다케(Candace)와의 합의로 프린켑스는 최종적으로 이집트 남부 국경선을 제1폭포 근처로 확정지었는데 이 국경선이 그뒤 300년 동안 유지된다. ... 이 참패 사건으로 인해 잃은 세 개 군단을 보충할 인력과 재원이 변변치 않자, 프린켑스는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고 엘베 강을 제국의 유럽 국경선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포기한다. ... 기원전 25년 프린켑스는 이 지역 종족 중 가장 위험한 살라시인들(the Salassi)을 진압하기 위해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Terentius Varro Murena)를 파견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