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 침잠하여 세속과 멀어지고자 함 ▶ 출전 :《최문창후 전집》 3. ... 귀국 후 최치원은 시무책을 올리며 국정의 쇄신을 꾀해 보기도 했으나 결국 현실과 뜻이 맞지 않아 말년에는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2. ... 속요는 시조 이외의 시가, 즉 장가의 한 형식이 되는 것으로 평민들 사이에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글이 만들어진 후 성종 때에《악학궤범(樂學軌範)》,《악장가사
발해기사를 단편적으로 전해주는 최치원(崔致遠)의 《최문창후전집》과 《삼국사기》 등에서는 발해를 지칭하는 '북국(北國)'이라는 용어가 상대적으로 신라를 '남국(南國)'으로 인식한 동일 ... 일제강점기에 장도빈·안확·권덕규 등도 이 시기를 남북국 또는 남북조라고 지칭하였다. 8·15광복 후 북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박시형·주영헌 등이 발해사를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입장에서 ... 또한 발해 멸망 후 고려로 귀부(歸附)해온 고구려 계통의 일부 지배층에 대해 고려 태조가 후히 대접하고, 발해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했던 것도 동족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시호(諡號 )는 문창후(文昌侯)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특히, 최씨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그리고 많은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집 愼獨齋全集》에 실린 〈최문헌전 崔文獻傳〉이 있다. 某腐芥無依。斷蓬自役。
구하였을 뿐 이익을 구하지 않았고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였을 뿐 내 몸 위하지 않았다 나그네 길 이별의 시름은 강 위의 빗소리요 고국에 돌아가는 꿈이 아득히 멀구나 - 최문창후전집 ...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범상치 않던 출생 당나라 유학시절 귀국 후 풍류객으로서의 삶 범상치 않던 출생 최치원의 신화적 출생 그 아이는 본래 문창성(文昌星)인데 잠시 인간 세계에 ... 내려와 최씨 집에 인연하게 되었노라.
그래서 정규복의 한문창작설, 설성경의 한문과 국문 이원표기설, 부쉐의 국문창작설등이 끊임없이 논쟁이 되어 왔었다. ... 그리고 그 후 그것이 남해 귀양 시절에 여유 있게 다듬어져 이루어진 것이 바로 A본이 아닌가 하는 강한 추측을 갖게 한다. ... 이런 결과 B본이 중 최고본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최문창후전집』 권1 다만 이것은 문맥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 발해멸망 후 10만 남짓의 발해유민이 고려에 歸服한 점을 중시하고, 이러한 배경에는 고려가 고구려와 함께 발해에도 큰 관심을 가져 이들을 피로 맺어진 동족으로 의식한 것에 따른 것이라는 ... 中央大學大學院硏究年報』4 발해를 일찍이 말을 낮추어 조공해온 적이 있는{ 노태돈,「對渤海日本國書에서 云謂한 『高麗舊記』에 대하여」는 일본측에 전해지는 고구려의 대일외교의 이러한 자세를 고구려멸망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