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쉽게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문무왕의 사망 직후에 만들어진 “신라문무왕릉지비”가 예컨대 태종무열왕의 “太宗武烈大王之碑”와 달리 ‘왕릉’의 비로 명기하고 있는 점 ...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또한 문무왕의 호국 의지에 관해서는 종래 감은사-호국용-대왕암-“欲鎭倭兵”으로 연결되는 서사 구조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필자는 “문무왕릉지비 ... 은 당시 신라인이 문무왕의 무덤에 대해 ‘왕릉’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산골이든 장골이든 간에 문무왕=해중 왕릉이라는 인식은 이미 당대의 인식으로서 성립해 있었다고 볼 수
다. 이수에는 매우 생동감 있는 6마리의 용을 새겼고, 그 한가운데 새긴 ‘태종무열왕릉지비(太宗武烈王陵之碑)’라는 글씨로 인해 능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보 제25호의 태종무열왕릉 ... 모두 신라왕의 무덤이지만 어느 왕의 무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무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현재로선 알 수가 없다. 경주의 무덤들은 능인지 묘인지 파악할 수 ... 없을 경우 통틀어 고분(古墳)이라 부른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발굴된 출토유물의 명칭을 따서 총(塚)이라 불렀다. 신라 금관이 처음 출토된 무덤은 금관총(金冠塚), 금방울이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