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리포트] 남명 조식
- 최초 등록일
- 2024.06.07
- 최종 저작일
- 20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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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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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남명 조식의 생애
2. 남명학파
3. 남명의 경의사상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남명 조식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인으로, 실천유학을 역설하며 지리산에 은거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하여 사람의 종사로 추앙받았다. 조식은 1501년 7월 10일 경상도 삼가현 토골(현 시점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조언형과 인천이씨의 아들로 외조부 이국의 집에서 태어났다. 조석은 벼슬에 있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한양과 단천을 오가면서 생활했다.
어릴 적부터 유교 경서 이외에도 스스로 제가백가, 불교, 노장사상, 천문, 승마, 의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였다. 25세에 『성리대전』에서 원나라의 유학자 “노재 허형”의 글을 읽고 자신의 학문의 방향과 출처관을 정했다. 이 시기부터 성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또한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이오, 밖으로 결단케 하는 것은 의이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새겨져 있는 경의검이라는 칼과 성상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며 자신의 행동을 단속했다. 칼은 안으로는 거울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괴단성있는 실천을 이룩하고자 하는 각오를 보여주고 방울은 방울소리를 통해 늘 깨어있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내외의 공부를 통해 그는 내면의 수양과 수양한 바의 실천을 함께 중시하는 학풍을 함양해 나갔다. 또한 이 시기에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아버지인 조언경이 죽고 부친이 파직되자 관직에 단념하게 되었다.
이후 부친이 사망하고 30세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산해정을 짓고 제자 교육에 힘썼다. 그의 학문적 목적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 하는데 있었다. 성운, 이원, 이희안과 더불어 담론, 토론하거나 편지 서신으로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그 학문적 기반을 쌓아나가게 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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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철, 2017, "處士로서 南冥의 삶과 敬義思想," 南冥學硏究 No. 53, pp. 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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