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황학맥의 호남 전파와 유학사적 의의
- 최초 등록일
- 2003.12.17
- 최종 저작일
- 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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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호남의 학맥 형성
3. 이황과 호남사림의 학문교류
4. 호남의 이황문인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영남'과 '호남'이라는 말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불린 것은 고려시대까지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16세기 중반부터였다. 이 시기는 재지 중소지주로서 성리학적 소양을 강하게 지닌 사림이 향촌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남과 호남이라는 별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됐다는 것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행정 단위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지역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영남과 호남의 정체성을 형성한 주체는 '영남사림'과 '호남사림'이었다. 1980년대까지 호남사림은 독자적인 세력이 아니라 기호사림에 포함되어 논의되어 왔으며 지역적으로도 경기·충청지방의 주변부로서 이해되고 독자적인 기반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정치·사상계가 경기·충청지방의 서인과 영남지방의 남인으로 재편되는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타당한 점이 없지 않으나 그 이전 시기에 적용시키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특히 16세기 호남사림들은 나름대로의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다양한 학파를 이루며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선조 초년에는 중앙 정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호남사림은 기본적으로 호남지방, 즉 전라도를 기반으로 중종대에 성립되어 성장한 사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조선 건국과 세조의 쿠데타, 연산군의 사화 등의 정치적 변동 속에서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에 연루됨으로써 받았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이주해온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로 연산군대에 서서히 등장하여 중종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흥기하였다.
그 과정에서 호남사림은 영남사림과 정치적·학문적으로 적지 않은 교류를 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결국 선조대에 가면 영남과 호남은 인재의 府庫로서 조정에 등용된 자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융성하였다. 이 글은 바로 이황학맥의 호남 전파를 16세기 사림문화 융성기에 영남과 호남사림의 학문 교류라는 차원에서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