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해방운동의 분화를 춘원 이광수와 단재 신채호를 통하여 살펴본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8.05.29
- 최종 저작일
- 20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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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비교하여 본래 하나로부터 출발한 민족해방운동이 어떤 이유로 분화되었으며, 양 세력의 논리와 그 실천방안, 민중관등을 분석한 한국근현대사 기말 보고서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2)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3) ‘민족개조론’과 ‘조선혁명선언’ 비교
3. 결론
본문내용
서론
춘원 이광수와 단재 신채호, 이 둘은 모두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민족해방을 위해서 노력했던 실천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3.1 민족해방운동 이후 양자는 극명하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광수는 변절한 뒤 친일행위들로 인하여 민족의 배신자가 되었으며, 신채호는 일제에 굴하지 않고 민족의 절대적 해방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이 둘이 다른 길을 걷게 된 과정과 이유는 1920년대 우리 민족 내부의 대립과, 독립운동 노선의 분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비교하여 본래 하나로부터 출발한 민족해방운동이 어떤 이유로 분화되었으며, 양 세력의 논리와 그 실천방안, 민중관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민족해방운동의 노선 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2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3.1 민족해방운동 이후 일본 총독부는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변경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민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이 때 일본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육성하려 하였고 그 대상으로 조선의 부르주아와 계층을 선정했다. 그 이유로는 먼저 이 들은 일본에 대해 소극적인 저항의 자세를 취했기에 회유가 상대적으로 쉬웠으며, 다음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포섭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에 적극적인 저항세력들에 대해서는 기존보다 강하게 탄압을 가해서 그 들을 분쇄하고, 양자를 차별대우함으로써 조선 독립세력 내부에 계급갈등을 유발하고자 하였다.
1)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광수는 그 동안 걸어왔던 민족독립노선을 버리고 민족개조를 주장하며 친일노선을 걷게 되었는데, 그가 1922년 잡지 ‘개벽’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에 그의 사상과 이론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민족 개조론은 다음과 같은 네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