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결론 :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장보고는 고향인 청해진(완도)을 기점으로 하여 당시 국가간 동아시아 무역의 주요 교통로였던 해양을 활용하여 국제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무역과 그것에 따른 인류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신앙(불교)을 활용하여 결속시킴으로써 한, 중, 일 3국에 걸친 국제적인 경제, 문화 복합시스템을 만들어 불교를 통한 동아시아 공통문화 형성에 큰 업적을 남겼다. 더욱이 문명 교루사 적으로도 실크로드의 한계를 연장시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까지 이었고, 그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장보고 선단이 활약했던 해양무대는 광활하여 주로 우리나라의 황, 남해 및 동중국해까지 이르렀다. 해양이라는 자연 생성물은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활동 무대였던 해양은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독특한 곳이어서 그만큼 항해의 어려움이 겹겹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고유봉,「장보고의 활동무대, 그 해양학적 특성」, 대한민국해양연맹, 『제주해양포럼』, 2004, Vol 1, p. 17.
해상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입지조건으로서 긴 해안선과 도서지방을 가짐으로써 바다에 사는 해양 지향의 민족성을 길러야 하고. 삼각무역을 중계할 수 있는 길목에 있어야 한다. 통일 신라시대에 활발한 국제교역이 이루어진 것은 정부의 규제가 완화 내지 소멸되어 자유로운 민간의 활동이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국력이 쇠퇴함으로써 장보고가 사망한 뒤로 중국인에게 동아시아에서의 해상패권을 물려주게 된 것은 정치의 안정이 결여되고 국가의 체제가 붕궤되었기 때문이었다. 시대는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기에 ‘해도인’이라는 차별 속에 중앙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제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고, 큰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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