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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이후 나례(儺禮)의 사습(私習)과 산대도감패의 흥행 활동 (The Informal Practice of Narye(儺禮) and the Popularity of Sandaedogampae(山臺都監牌) after Injo(仁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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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7.16 최종저작일 20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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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이후 나례(儺禮)의 사습(私習)과 산대도감패의 흥행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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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공연문화학회
    · 수록지 정보 : 공연문화연구 / 28호 / 83 ~ 151페이지
    · 저자명 : 사진실

    초록

    이 연구에서는 인조 이후 나례 사습의 전통과 변모 과정을 고찰하고 산대도감패의 흥행 활동이 활성화되는 양상을 논의하였다. 탈춤 산대도감극이 서울 시정문화의 산물로 형성된 문화사적 맥락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첫 번째 논의에서는 나례도감의 변모 과정을 살피고 포도청이 나례 관련 주요 기관으로 대두한 상황을 밝혔다. 병자호란 이후는 나라가 피폐해졌을 뿐만아니라 침략자였던 청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나례를 더욱 축소하였다. 의금부와 군기시가 독립적으로 나례도감의 일을 맡던 전례를 버리고 영접도감 안에 나례색을 두어 관리하였다.
    30년 가까이 나례가 거행되지 않다가 정조 8년(1784)에 나례를 복구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때는 좌우 포도청이 나례도감의 일을 맡았다. 독립적인 기구로서 나례도감의 위상도 회복되었는데 나례의 잡희를 맡은 재인들의 금란(禁亂)과치안 유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공연예술에 대한 민간의 수요가 크게 증대되어 통제하기 어렵게 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두 번째 논의에서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나례의 사습(私習)이 정착되면서도성 안팎에 흥행 공간이 활성화되는 양상을 밝혔다. 나례의 사습은 모화관이나숭례문 밖에서 거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는데 도성 안팎의 백성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나례의 사습 장소였던 모화관과 남대문 근방은 나례와 상관없이 주요한 흥행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산대도감패의거주지로 알려진 녹번이나 남대문 밖 큰 고개는 이러한 흥행 공간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논의에서는 나례의 사습이 도성 안팎 백성들의 오락물로 부각되면서산대도감패의 민간 흥행 활동이 강화되는 양상을 탐구하였다. 영조 이후 나례는중국 사신을 접촉한 원접사(遠接使)의 이문(移文)에 따라 설행 여부가 결정되었다. 설행할 것을 대비하여 나례를 준비하다 보니 나례의 정지가 결정되면 나례도감에 모인 재인들이 흥행 활동에 나섰다. 그들은 나라에서 가장 성대한 구경거리가 된 산대 나례의 명성을 내세워 산대도감패로 활동할 수 있었다. 또한 산대도감패가 산붕놀이의 도구를 빌어다 놀이판을 열었다는 사실, 포도청이 민간의 놀이판에 광대와 좌우 산붕을 대령했으며 나례도감의 주무 기관이 되었던 사실 등을 통하여 산대도감패와 좌우 포도청의 친연 관계를 밝혔다.
    궁정 문화의 입장에서 보면 인조 이후 나례는 쇠퇴하였지만 민간 문화의 입장에서 보면 나례는 해체되어 서울 시정의 흥행물로 활성화되었다. 산대 나례의전통은 동아시아의 중세적 보편성을 지녔고 탈춤의 전통은 자생적인 민속 문화에 기반을 두었다고 할 때 탈춤 산대도감극은 서로 대립적인 두 문화가 충돌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속 연구에서는 이러한통시적 변천의 양상이 현전 탈춤 산대도감극에 어떻게 축적되어 있는지 밝히고자 한다.

    영어초록

    This research examines how Saseup(私習, informal practice) of Narye(儺禮, festival for welcoming chinese envoys) changed after Injo(仁祖), andhow the popularity of Sandaedogam-pae(山臺都監牌, troupes fortraditional performing arts like mask dance in Seoul, 18∼19C) becameactive.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lies in establishing the context, in thefield of cultural history, of how Sandaedogamgeuk(山臺都監劇, a form ofmask dance in Seoul), was formed in the basis of popular culturecirculating market places in Seoul.
    The first part discusses the process of change experienced byNaryedogam(儺禮都監, office of superintendency for Narye), and howPodocheong(捕盜廳, capital police) emerged as one of the primary agenciesrelated to Narye. Narye was especially marginalized after the invasion ofQing(丙子胡亂), after which Chosun became impoverished and was forcedto receive imperial envoys from Qing. Although the Uigeumbu(義禁府,Correctional Tribunal) and the Gungishi(軍器寺) had independently takencharge of duties of the Naryedogam, this tradition was abandoned and thesaid duties were assumed by Naryesaek(儺禮色), which was establishedinside Youngjup-dogam(迎接都監). Efforts to revive the Narye during thetime of Jungjo(正祖), which also boosted the role of Naryedogam as anindependent agency, aimed to strengthen the regulation of Jaein(才人) thatwere in charge of performances of Narye. This was a reflection of thedifficulties in controlling performing arts in light of the large increase inpopular demand.
    The second part illuminates how the informal practices of Narye becameadapted to receiving Qing envoys, stimulating its popularity both inside andoutside the capital. The performance of Narye Saseup came to be heldtraditionally outside Mohwa-guan (慕華館) or Namdae-mun(南大門),which resulted in an increased demand from the ordinary population towatch the shows. In fact, performance spaces outside Mohwa-guan andNamdae-mun morphed into important spaces for popular arts independentof Narye. Nokbun(碌磻) and the large pass outside Namdae-mun, whichwere known to be the residential area of the Sandaedogam-pae, are relatedto the establishment of such spaces.
    The third part investigates the increased activity on behalf of theSandaedogam-pae among ordinary citizens through the rise of NaryeSaseup as a form of entertainment around the capital. After Youngjo(英祖),whether Narye would or would not take place in reception of Qing’senvoys was decided when envoys from both nations met beforehand. Sincepreparations for Narye began even before the notification from the envoyscame, the performers gathered at Naryedogam partook in performingactivities for the public when Narye was cancelled. They were able toperform as Sandaedogam-pae, under the pre-established fame ofSandae-narye(山臺儺禮) as the most magnificent entertainment in thenation.
    Although Narye declined as a form of royal culture after Injo, it becameactive as a form of popular culture circulating market places for ordinarycitizens. Since the tradition of Sandae-narye was common throughoutmedieval East Asia and the tradition of mask dances was based on theself-generated folk culture, Sandaedogam-geuk can be said to have formedfrom a collision and mixture of two conflictual cultures.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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