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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表象: 석굴암의 公論化 (The Beginning of Public Opinion on Seokguram during Japanese Occupation (1910-1945)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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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6.05 최종저작일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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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表象: 석굴암의 公論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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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동악미술사학회
    · 수록지 정보 : 동악미술사학 / 10호 / 115 ~ 135페이지
    · 저자명 : 강희정

    초록

    석굴암이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상징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에 의해 ‘근대적으로 석굴암이 발견’된 이후, 비로소 석굴암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은 공공연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석굴암이 대중들에게 공개되어,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재가 된 경로와 과정을 석굴암의 ‘공론화’로 규정하고자 한다. 공론화는 먼저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규정 과정과 이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작용에 의해 활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창건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석굴암은 불교 사원으로, 성스러운 예배의 공간으로 기능했지만 ‘근대적 재발견’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관광의 대상으로 변화되었다. 석굴암을 목적지로 한 여행과 그에 대한 인식은 강점기 일본인들이 제시한 문화재로서의 새로운 개념 규정, 취미로서의 관광이라는 측면이 주축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을 조선의 대표적인 과거 미술로 상정하고, 대대적인 수리・복원 공사를 통해 근대적 취미의 공간인 관광지로 변화시켰고, 산길을 뚫어 불국사로부터의 접근을 용이하게 했다. 이 길은 석굴암의 관광지화를 촉진하고, 이를 통한 마음 속 과거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과거 조선의 영화를 대변하는 석굴암 관광은 유적을 보호할 줄 아는 문명국 일본의 자랑이 되어 쇠락한 현재 조선을 고도의 문명국가인 일본과 대비되는 타자로 인식하게 했다. 석굴암이 조선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된 것은 제국주의 근대 국가 ‘일본’의 주도로 그들의 認知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석굴암이라는 시각적 상징을 매개로 자신들의 정체성과 조선인의 일체감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석굴암이 조선의 상징이라는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일본 정부와 지식인에 의해 이뤄진 일이지만 석굴암을 통한 민족적 자아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시기 조선인들에 의한 석굴암의 공론화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그 하나는 견학이나 답사의 맥락에서 이뤄진 여행, 혹은 관광이며, 이를 통한 시각적 확인의 과정은 ‘문화재’라는 새로운 개념을 대중들에게 전파시키고, 과거의 유적은 보호되어야 할 국가의 유산으로 생각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1920년대 이후 활발해진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과 일반인의 여행 대상에는 경주와 석굴암이 포함된 경우가 많았다. 관광여행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과 일반 대중들을 위한 幻燈映寫會 관련 기사는 문화재에 대한 근대적 시각 체험이 다양하게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지방을 중심으로 개최된 영사회는 계몽적 성격이 강했으며, 영사회에서 보여준 대중들의 갈채는 이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가 가능했음을 알려준다. 근대적 시각 매체를 통해 석굴암과 같은 과거의 문화유산은 민족의 일체감과 자존 의식을 고양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각적 확인의 과정인 여행과 다른 일반적인 공론화 과정은 언론 보도와 지식인들의 논의에 의해 활성화되었다. 신문지상에 실린 빈번한 기사는 석굴암에 대한 주목도가 높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기사를 통해 대중들이 석굴암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조선민족이 석굴암을 창조할 능력이 있었다는 자부심과 긍지는 지식인들의 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식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석굴암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글이나 미술 작품으로 남겼다. 석굴암과 그 안의 조각을 대상으로 기행문, 시, 시조 등을 쓴 문인들의 창작 활동은 민족적 자아의 출발지인 석굴암 열기를 더욱 확대시켰다. 일본이라는 외부로부터, 위로부터 주어진 조선의 정체성은 석굴암을 조선의 표상으로 만듦으로써 공고해졌지만 점차 조선인 스스로 자신의 자의식을 깨닫게 하는 매개로 작용하기도 했다.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문화재를 발굴・발견했던 일본에 의해 각인된,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산, 석굴암’이라는 인식의 공론화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에 대한 자존과 자긍심을 부여하여 공동체 의식을 북돋워주는 결과를 낳았다.

    영어초록

    Seokguram began to get public notion during Japanese Occupation as one of the greatest work of arts in Korea, also imagined as 'a magnificent flower of the nation(國の精華)'. This article investigates to make clear the process how this religious monument has become a cultural property as a "National Treasure" and the most significant symbol of Joseon. Before Japanese rulers and scholars rediscovered it in 1909, Seokguram was a sacred place where the Buddhists had been worshipping and having ritual services as a religious monument. From the moment they rediscovered Seokguram, Japanese scholars made the monument to the 'national treasure'. Japanese art historians like Sekino Tadashi(關野貞) tried to form the Korean art history especially focusing on the Buddhist art including Seokguram. Since Okakura Tenshin(岡倉天心) had advocated that the fine arts represented the prosperity of a certain nation, Japanese scholars considered the Buddhist art as the core among various cultural properties in Asia. They advertised Seokguram extensively the most magnificent cave temple site in Asia. After the Japanese repaired the site and made the road to Seokguram from Bulguksa(佛國寺) temple with huge cost, many of them visited Seokguram. When they saw the cave, they also thought about the glory of the 'past Joseon' and compared it with the glory of the 'present Japan'. This idea made their national identity consolidate. The more the idea spread, the more the thinking of Joseon people was also changed. At the early days of Japanese Occupation, Joseon people felt inferior to modern Japan. Due to Japanese propaganda about the excellence of Korean arts including Seokguram, Joseon people changed their mind. Although one had never been to Seokguram, he would have proudly imagined it as a "National Treasure". Many intellectuals in Joseon created their own works of art like poem, essay, painting with Seokguram. It seems that those works contributed to make the national identity of Joseon people. Consequently, it followed that both Japanese and Joseon people recognized Seokguram as an important art work rather than a sacred place of Buddhism. Both people thought that Seokguram was 'a magnificent flower of the nation', as in words that Tenshin had insisted. It seems that these ideas about the cultural properties were useful for 'nation building'. The new idea about Seokguram influenced their national identity formation in each country, not only Colony Joseon but also Colonizer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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