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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황극교(皇極敎)의 ‘신국가(新國家) 건설운동’ (The Hwanggeuk Faith’s ‘New Nation-Building Movement’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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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5.31 최종저작일 2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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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황극교(皇極敎)의 ‘신국가(新國家) 건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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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 수록지 정보 : 韓國宗敎 / 47권 / 187 ~ 214페이지
    · 저자명 : 안후상

    초록

    1926년에 비밀리에 조직된 황극교(皇極敎)의 원래 이름은 황석공교(皇石公敎)다. 1932년에 은세룡(殷世龍)과 김영식(金靈植)은 전라북도 김제군 모악산에서 ‘황석공교(皇石公敎)’를 ‘황극교(皇極敎)’로의 고침을 알리는 ‘천류(天禷)’라는 이름의 고천제를 행하였다. 황극교의 교주는 가공의 인물 정해도(鄭海桃)이다. 은세룡은 교인들에게 “정해도는 경진년 경진월 경진일 경진시에 계룡산에서 출세하므로 천지인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위 천류를 거행한다”고 설파하였다. 당시 정읍(井邑)을 중심으로 활동한 보천교(普天敎)나 무극대도(無極大道) 역시 ‘계룡산 등극설’이나 ‘계룡산 출세설’을 강조하였다.
    은세룡은 1935년 음력 7월 7일에 경기도 개성의 두문동(杜門洞)에서 한국의 독립 의식을 앙양하기 위한, 고려의 충신 정몽주 외 수십 명의 수령제(受靈祭)를 거행하였다. 고려(高麗)의 우국충정을 이어받겠다는 상징적 의미가 포함된 수령제를 거행함으로써 반일(反日) 의식을 교인들에게 심어주었다. 더불어 가공의 인물 정해도가 계룡산에서 출세하여 천제를 지내고 한국의 국왕으로 등극한다는 예언도 하였다. 정해도가 등극할 때에 한국은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게 된다고도 설파하였다. 이것이 황극교의 ‘신국가 건설운동’이다. 엄혹했던 식민지시기에 이러한 생각이나 발언, 또는 그 행동이 외부로 알려질 것에 대비하여 교인들에게 ‘불교(佛敎) 마크(Mark)’를 패용토록 지시하였다. 불교인으로 가장하여 일제의 탄압을 가급적 피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황극교의 ‘신국가 건설’은 곧 한국의 독립을 의미하였다. 즉 황극교주 정해도가 한국의 국왕이 되면 한국(韓國)은 신국가(新國家)가 된다는 취지였는데, 이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당시 민중들에게 제시한 일종의 정치적 예언이었다. 황극교의 이러한 예언은 일제에게는 매우 불온한 것이었다. 황극교의 ‘신국가 건설’은 1920년대에 전라북도 정읍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친 보천교나, 1940년 전후의 보천교계 신종교들의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을 연상케 하였다. ‘신정부’가 ‘신국가’로 바뀌었을 뿐 그 과정이나 추구하는 목표는 보천교계 신종교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였다. 일제의 기록이나 당시 신문에 의하면, 보천교 간부들이 황극교를 조직하였다고 돼 있기도 하다.
    황극교의 은세룡과 교인들은 일제로부터 탄압을 당하기 직전인 1937년 음력 1월에 황극교주 정해도가 출세해 제위에 오를 것에 대비해 정청(政廳)으로 쓰일, 또는 정해도가 지낼 천제 장소로서의 삼황묘(三皇廟)를 계룡산에다 건립할 것을 준비하다가 경찰에 의해 검거 당하였다. 황극교는 신국가 건설운동을 통해서 당시 억압받는 식민지 민중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당시 한국의 신종교는 단순히 개인의 사적인 종교가 아닌, 철저한 반일성과 민족성에 바탕을 둔 민족종교였다. 따라서 이들 종교는 사상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일제는 황극교의 이러한 행위를 ‘국체(國體)를 변화할 목적으로 한 결사체’로 바라다본 것이다.

    영어초록

    The original name of the Hwanggeuk faith (-gyo) that was organized in secret in 1926 was Hwangseokgong (Chinese, Huángshígong)-gyo. Although it was known that the founder was Jeong Hae-do who was a fictitious character, the Hwanggeuk-gyo was established and governed by Eun Se-ryong.
    He held sacrificial services for scores of royal governors including Jeong Mong-ju of the Goryeo Dynasty to awaken the spirit of independence of the Korean people at Dumun-dong, Gaeseong on July 7 in 1935 by the lunar calendar. By holding the ancestral services with symbolic meanings to acquire and imbibe the patriotism of Goryeo, he intended to instil in the adherents an anti-Japan consciousness. In addition, he predicted that Jeong Hae-do would come forth in the world from Mt. Gyeryong and come to the throne after he held a sacrificial service dedicated to heaven. He also foretold that Korea would rid itself of its colonial status and achieve independence when Jeong comes to the throne. It was Hwanggeuk-gyo's ‘New-Nation Building Movement.’ The Hwanggeuk-gyo's ‘New-Nation Building Movement’ signified the independence of Korea. That is, it signified the intention that Korea would establish a new nation if Jeong Hae-do became king of Korea. It was a type of political prophecy presented to the people who dreamed of a new world. Such a prophecy was a very disquieting to the Japanese imperial government. It reminded the Korean people of Bocheon-gyo, which exercised a considerable influence around Jeongeup of Jeonbuk, and also recalled the ‘New Government- Building in the Ideal Land of the Later Days’ based on new religions derived from the Bocheon-gyo. According to the records kept by the Japanese authorities, Bocheon-gyo's staff organized Hwanggeuk-gyo.
    Eun Se-ryong and his devotees were arrested by the police while preparing for the construction of the ‘Grave for the Three Emperors (samhwang-myo)’ at Mt. Gyeryong as a place for holding the service to Heaven (cheon-je) when Jeong Hae-do came forth in the world in January in 1937 by the lunar calendar. Hwanggeuk-gyo presented a new possibility of new nation-building to the people who were oppressed under colonial rule. In those times, new religions of Korea were national religions based on anti-Japanese sentiment and patriotism, not private religions. Therefore, they were closely related to activities to achieve the independence of the Korean people both in ideological and social terms. The Japanese government considered the activities to be of an “organization with the aim of changing the national polity.”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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