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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창극사를 통해서 본 해방공간 창극 연구 (Research on the ‘Liberation Period Changgeuk (해방공간 창극)’ by the Changgeuk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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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5.12 최종저작일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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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창극사를 통해서 본 해방공간 창극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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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국문학회
    · 수록지 정보 : 국문학연구 / 31호 / 281 ~ 328페이지
    · 저자명 : 손태도

    초록

    1902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만들어짐으로써 판소리를 잇는 근대적 공연물로서의 창극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창극은 배역을 나눠서 판소리를 부르는 것과 같은 판소리 입체창과 비슷하였다. 당시는 앞과장, 뒷과장이라 해서 앞과장에서는 종래 하여 왔던 무용, 노래, 기악연주(器樂演奏), 땅재주 등을 하고, 뒷과장에서 창극을 했다. 그래서 <춘향전>이면 그것을 3일에 걸쳐 나눠서 했다. 창극은 그런 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가 만들어지고, 이 단체에 의해 비로소 1936년부터 <춘향전>, <흥부전>, <배비장전>, <유충렬전> 등과 같은 작품을 한 번 공연에 모두 공연하는 이른바 ‘전편(全篇) 창극’이 이뤄졌다. 이때는 김창환을 이어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등 근대의 5명창들이 창극을 주도했다. 1919년 3・1운동 뒤의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치와 그 뒤를 이은 1930년대의 전통문화 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창극이 나름대로 일정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고,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는 전시(戰時) 체제로 들어갔다. 창극은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해방 후 창극은 비로소 재도약 시기를 갖게 된다. 좌우익의 대립이란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침체란 기본적 사회적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고조된 민족주의와 함께 국악인들이 ‘대한국악원’을 중심으로 모였고, 국악인들은 창극을 그들의 가장 주요한 공연 방식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대한국악원 직속의 ‘국극사’와 개별단체들인 ‘조선창극단’, ‘국극협단’, ‘김연수창극단’ 등이 기존에 해 왔던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등의 작품들도 제대로 다듬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작품들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그래서 <청산도 절노, 사람도 절로>, <선화공주>, <왕자호동>, <예도성(濊都城)의 삼경(三更)>, <단종과 사육신>, <만리장성> 등 수준 높으면서도 흥행력을 지닌 작품들을 단체마다 이른바 3개월에 한 편 꼴로 내놓았다. 서울에서의 공연 후 지방의 30개 도시를 도는 데 3개월 정도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산영화가 초기 단계였고, 외국영화의 수입도 제한되어 있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시들의 극장들은 악극(樂劇), 창극, 신파극, 신극(新劇), 버라이어티 쇼 등 이른바 무대공연 시대였다. 창극은 수준 높은 민족예술적 면이 있는 동시에 대중적 흥행력도 지니고 있어 상층의 문화인사들이나 일반 대중들이 모두 일정한 관심을 가졌기에, 광복을 맞은 새로운 조국에서 실로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 공연물이 될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창극 현장에 오랫동안 있었던 박황(1917년생)은 해방공간을 창극의 ‘최고 융성기’라고도 했다.
    그러나 6․25동란이 일어나므로 이 모든 것이 일시에 중단되었다. 또 당시 창극 활동을 주도해 왔던 박동실, 정남희, 조상선, 임소향(여) 등이 월북하므로 창극계의 공백은 컸다. 여기에다 1948년에 성립되어 전쟁 전부터도 극장가의 관객을 독점하고 있던 여성국극 공연들은 더욱 넘쳐나 이른바 남녀 혼성 창극단들의 설자리마저 없게 했다. 그 결과 1955년부터 창극단들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1958년에는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창극 부재의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한으로 넘어간 창극인들은 이후 북한 가극의 기반이 되는 음악극을 만들었다. 남한에는 김연수를 단장으로 1962년 국립창극단이 만들어져 창극의 명맥을 유지했다.
    판소리가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 공연물이듯이, 판소리를 잇는 창극도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 공연물이 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창극이 비로소 제대로 이뤄지기 시작했고, 논자에 따라서는 창극의 ‘최고 융성기’였다고 하는 해방공간의 창극은 오늘날 우리가 창극을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공연물로 만들어 가는 데 분명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오늘날 한국창극사란 시각에서 해방공간의 창극을 연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어초록

    ‘Hyopyulsa (협률사, 協律社)’, the first modern theater, was built in 1902. Changgeuk (창극, 唱劇), modern performing art derived from Pansori, began in that theater. However that Changgeuk was similar to singing Pansori in divided characters style. There were former stage and later stage. Conventional dances, songs, instrumental music plays, and acrobats were performed at the former stage and Changgeuk was performed at later stage. So Changgeuk <Chunhyang-jeon (춘향전)> was performed in 3 days. Changgeuk was started in that way.
    ‘Society for Joseon Vocal Art (조선성악연구회)’ was made in 1934. The Society made possible to show all the work at once, the works like <Chunhyang-jeon>, <Heungbu-jeon (흥부전)>, <Baebijang-jeon (배비장전)>, <Yuchungryeol-jeon (유충렬전> etc. So to speak, a entire work performance period began. After Kim Chang-hwan, Song Man-gap, Yi Dong-baek, Kim Chang-ryong, Jeong Jeong-ryeol, 5 great singers in early modern time, led that Changgeuk. Japan’s Cultural Policy and the movement of traditional Joseon culture in 1930’s began after March 1th Claiming Movement in 1919. But it was in the time of Japanese colony and Japan went into the war mode at the Japan to China War in 1937, and the Pacific War in 1941. Changgeuk could no longer be developed.
    After the liberation, Changgeuk could have re-jumping time. There were the conflict between leftists and rightists and the basic economic poverty problem. But Korean traditional music artists gathered around ‘Korean Traditional Music Institute (대한국악원)’ in heightened nationalism and presented Changgeuk as their most important performing art. So ‘Gukgeuksa (국극사)’, the Changgeuk Troupe of the Korean Traditional Music Institute, and independent Changgeuk Troupe like ‘Joseon Changgeuk Troupe’, ‘Changgeuk Association’ and ‘Kim Yeon-su Changgeuk Troupe’ re-made <Chunhyang-jeon>, <Simcheong-jeon (심청전)>, <Heungbu-jeon (흥부전)>, <Janghwahongryeon-jeon (장화홍련전> etc., that were handed down, and made new works competitively. So every Changgeuk Troupe should make a new one in every 3 months like <Cheongsando Jeolno, Saramdo Jeolno (청산도 절노, 사람도 절노>, <Princess Seonhwa>, <Prince Hodong>, <Midnight of Ye (예, 濊) Castle)> (예도성의 삼경), <King Danjong and Sayuksin (사육신, 死六臣>, <Great Wall> (만리장성) etc. that were high level in art and popular in ordinary people. Because it was 3 months for performing a new work from the theaters of Seoul to the ones of 30 big cities.
    At that time domestic movies was an initial step, and ths imports of foreign film was limited, so it was theater performing era for Operetta (악극, 樂劇), Changgeuk, Sinpageuk (신파극, 新派劇), Singeuk (신극, 新劇), and Variety Show. Both high level cultural figures and ordinary people all had concern for Changgeuk, because Changgeuk had the aspects of ethnic art and popular entertaining. As a result, there was a room that Changgeuk became to be the most important performing art in the liberated father land. So Park Hwang (born in 1917) who placed the field of Changgeuk for a long time, said the liberation period was the most prosperous time in the whole history of Changgeuk.
    But the Korean War taken place on Jun 25th in 1950 stopped all these processes. Also there was a big blank, because Park Dong-sil, Jeong Nam-hui, Jo Sang-seon, and Im So-hyang (woman), all were very important persons in Changgeuk, went to North Korea after the War. Futhermore the ‘Woman Gukgeuk (여성국극)’ oversupplying took all chances of so-called man and woman co-ed Changgeuk Troupes. The ‘Woman Gukgeuk’ was made in 1948 and already started to monopolize the audiences of theaters before the War. As a result, Changgeuk Troupes doomed out since 1955, and there was no Changgeuk Troupe by 1958. It became the time of no Changgeuk Troupe.
    The people of Changgeuk that went to North Korea made music play form that became the foundation of today’s North Korea Operetta (가극, 歌劇). South Korea made a ‘National Changgeuk Troupe (국립창극단)’ to maintain the life of Changgeuk.
    As Pansori is the most representative performance art in our country. Changgeuk succeeding Pansori needs to be the most representative performance one in our country too. ‘Liberation Period Changgeuk’ was proper Changgeuk for the first time, and could be called the most prosperous period Changgeuk by someone. Therefore, that Changgeuk will be the most important guider to us trying to make today’s Changgeuk to be the most representative performance art of our country. The reason studying Liberation Period Changgeuk in the view of the whole Changgeuk history is right here.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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