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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 반룡사와 體元의 화엄사상 (Banryong Temple(盤龍寺) at Goryoung(高靈) and Chewon(體元)'s Thought of Hwaŏm)

3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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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4.23 최종저작일 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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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 반룡사와 體元의 화엄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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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 수록지 정보 : 영남학 / 43호 / 5 ~ 37페이지
    · 저자명 : 채상식

    초록

    고령에 소재한 반룡사는 어떤 역사적, 사상·신앙적 특징이 있는지를 살펴본 글이다. 우선 반룡사에 관한 자료를 검토한 결과 반룡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해인사와 같은 시기에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현전하는 반룡사 다층석탑의 조성시기는 문헌자료와 연결하면 고려중기일 가능성이 높다.
    반룡사에 관한 문헌자료로서 원 세조가 내린 榜文이 있다. 이 방문을 내린 사찰은 현 반룡사가 아닌 것 같다. 당시 몽고군이 주둔한 창원의 남쪽에 있는 ‘반룡산’이 주목된다.
    한편 「送盤龍如大師序」를 검토한 결과 반룡사를 실제 개창한 인물은 승통 寥一이다. 그는 李仁老(1152~1220)의 大叔으로 화엄종 사찰인 개경의 흥왕사 승통이었으며, 최충헌을 모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은 적이 있다. 요일이 개경에서 벗어나 반룡사에 정착한 것은 아마 중앙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멀어진 화엄종단의 부흥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곧 반룡사를 터전으로 삼아 인접한 해인사, 법수사 등과 나아가 경상도 지역에서 화엄종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활동한 것은 아닌가 한다.
    한편 충숙왕대에 이르러 반룡사에는 體元이 새로운 주법으로 부임한다. 그는 경주이씨로서 이제현의 家兄이며, 해인사 사간판에 수종의 자료를 남기고, 『화엄경』을 寫經한 바 있다. 그가 남긴 저술을 검토한 결과 관음신앙을 강조하고 또 이를 통해 공덕과 영험까지도 표방하고 심지어 민간신앙과 결합된 성격을 띤 사상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곧 체원이 중심이 된 14세기의 화엄종은 신앙적인 측면이 두드러진 불교관을 표방함으로써 한 단계 진전된 화엄사상을 표방하지는 못한 셈이다.
    여기서 중심되는 것은 관음신앙이었는데, 당시 불교계의 공통된 사상·신앙적 경향이었다. 대몽항전, 삼별초 항쟁, 동정군의 전란과 이에 계속된 이민족의 지배라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현세구원적인 활로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난 산물이었다.
    본래 관음신앙은 義湘 이래 낙산관음 설화와 결합하면서 전통적으로 일반 민들과 함께 호흡한 소박한 신앙이었다. 이 시기에 오면 관음신앙은 공덕과 영험을 중시하는 신비적인 요소와도 결합하여 사치한 귀족적인 불교로 성행하게 되었다. 곧 이중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러한 산물이 佛畵와 사경, 대규모 불사 등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체원은 의상-균여-수기로 이어지는 화엄종의 실천적이면서 대중적인 경향을 계승한 인물이라고 하겠으나, 그가 관여한 사경 등을 보면 귀족적인 경향과 멀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영어초록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ical features of the thoughts and faith which Banryong Temple at Goryoung had displayed in Koryŏ Dynasty. To begin with, the interrogations of written sources on Banryong Temple shows that it had been built up at the same time when Haein Temple had been set up in the year three of King Aejang of Silla(A.D. 802). It is more likely that the multi story-stone pagoda handed down up to now at Banryong Temple had been elected at the middle of Koryŏ.
    Of the written sources, there is a public notice(榜文) which Sejo of Yüan had granted. It seems that it had granted not to Banryong Temple but to Mt. Banryong south of Changwon where the Mongolians had stayed at that time.
    According to Songbanryongyeodaesaseo(送盤龍如大師序), it was the master successor Yoil(寥一) who had really established Banryong Temple. He, an older uncle of Lee In-Ro(1152~1220), was the master successor of Heungwang Temple and had been suspected of conspiring to do harm to Choi Choong-Heon. Probably, he intended to rehabilitate Hwaŏmjong order estranged from central power going out from Gaekeong into Banryong Temple. He may have directed toward the consolidation of solidarity between temples of Hwaŏmjong at Kyeongsang region having Banryong Temple as a stronghold.
    Meanwhile, Chewon held newly the Joobeop(主法) position under the reign of King Choongsook. As the Lees of Gyeongjoo, he was an older brother of Lee Jehyeon, remained several sources to Saganpan of Haein Temple, and had copied Hwaŏm Sutra. The interrogation of his writings shows that he had stressed the faith of Avalokitêsvara(觀音) and claimed for his virtues and miracles by this faith. He even displayed the trend of thought combined with a folk belief. Thus, Chewon's Hwaŏm of the fourteen century had failed to present the thought taken a step forward by exhibiting their vision of Buddhism inclined to a faith.
    The central to this thought was the faith of Avalokitêsvara, which was a common trend of the Buddhist milieu at that time. This was an output of making every effort to search the actual salvation from the terrible real of successive wars and the control by other peoples.
    Initially, the faith of Avalokitêsvara was conventionally a naive faith closed with folk after it had mixed with the tale of Naksan Avalokitêsvara from the age of Ŭisang(義湘) on. By that time, it combined with the mystic factors focused on the virtues and miracles and became to be prosperous as an expensive faith of the aristocracy. It can be said that this dual character of it had been reflected on the Buddhist paintings, the copies of the Sutras, and the large scale Buddhist services. The copies of the Sutras related by Chewon demonstrates that he did not keep away from the aristocratic trends, though he had succeed to the practical and popular trends of Hwaŏm.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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