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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杜師忠)의 생애와 모명재(慕明齋)에 대한 역사적 고찰 (Historical review on the Du Sachung and Momyeong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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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4.14 최종저작일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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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杜師忠)의 생애와 모명재(慕明齋)에 대한 역사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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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대구사학회
    · 수록지 정보 : 대구사학 / 119권 / 177 ~ 210페이지
    · 저자명 : 진병용

    초록

    두사충은 1592년 12월 명(明)의 조선원군(朝鮮援軍)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참모인 수륙지획지사(水陸指劃主事)로 병영과 진터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아 활약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본국으로 돌아갔던 두사충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유정(劉綎)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조선원군의 일원으로 두 아들과 함께 다시 조선에 왔다. 매부인 수군 도독 진린(陳璘) 휘하의 비장(裨將)의 직책으로 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남아 대구에 터를 잡고 일가를 이루며 살았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조선 조정이 하사한 현 경상감영공원 일대에 살았으나 선조 34년(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해 오자 거처를 계산동 일대로 옮겼고, 나중에는 다시 최정산(현 앞산으로 추정됨) 아래로 이사하여 호(號)를 모명(慕明)이라 짓고, 동네 이름도 대명동(大明洞)이라 하고 동구 밖에 단을 쌓아 초하루와 보름마다 관복을 갈아입고 북녘을 향해 절했다고 한다. 두사충은 풍수지리에 매우 밝아 조선에 귀화한 후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양반사회의 많은 사대부들과 교유하면서 명당(明堂)의 묘터를 봐주었다. 두사충은 항왜장군 김충선(일본명 沙也可)과 고려말 충신 우탁(禹倬) 선생의 후손인 백록당 우성범(禹成范)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대구에서 살다가 죽은 두사충은 그가 살아있을 때 잡아놓은 묏자리인 형제봉 기슭(현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묻혔으며, 묘소는 지금까지 잘 보전되고 있다.
    두사충의 묘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산기슭 아래에 모명재(慕明齋)가 자리 잡고 있다. 모명재가 있는 만촌동 느지마을은 두사충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두릉두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두 세 가구만이 살고 있다.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구해 짓고 그 후 몇 차례 중수한 것이다. 모명재의 정문은 만동문(萬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모명재 안에는 여러 개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모명재 경내에는 두 개의 비(碑)가 서 있는데, 그 하나는 이순신의 7대손으로 행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를 지낸 이인수(李仁秀)가 지은 신도비(神道碑)이고(1802년 두사충 묘 옆에 건립한 신도비의 비문과 동일한 비문을 새긴 신도비를 1969년에 새로 건립함), 또 다른 하나는 모명재 중수에 공이 큰 10대손 두병선의 공덕비다.
    두사충에 대한 역사 문헌과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두사충이 살던 때로부터 거의 300년이 지난 1907년에 이르러 10대손인 두병하(杜炳夏)가 두사충의 삶과 행적을 정리한 실기(實紀)와 족보 등을 정리함으로써 비로소 두사충의 행적이 밝혀지고 역사적 조명을 다시금 받게 되었다. 그의 선조와 고향, 귀화 후의 구체적인 행적 등에 관한 연구가 부족할 뿐더러 두사충과 모명재가 지닌 역사적 의의와 그의 공적에 대한 현창(顯彰) 노력도 미흡했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 간 관계개선과 협력체제의 구축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때에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두사충과 모명재를 지역의 문화자산으로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구를 찾는 중국인 관광객의 수가 날로 늘어나는 때에 모명재를 중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 명소로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영어초록

    Historical review on the Du Sachung and Momyeongjae

    Jin Byung yong

    [Abstract]

    Du Sachung was one of the assistance forces of Ming Dynasty to save Joseon Kindom i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952(Imjin War). He took in charge of building barracks and military camps as an advisor under the command of General Li Ru-song. After two years of making a contribution in the war, he returned to his native country in a truce. And he went to Joseon with his two sons to support Joseon forces when Japanese army invaded again in 1597. This time he was assigned to navy forces under the command of Admiral Chen Lin, his sister’s husband.
    After the war was over he remained in Joseon and settled down in Daegu. He was granted a land by the royal court of Joseon and lived at central part of Daegu area with his two sons. He moved to Gyesan-Dong area in 1601 and finally went to Daemyeong-Dong which was located under Choijeongsan Mountain. He was knowledgeable about geomantic theory. He socialized with many high-level scholar-officials including Admiral Yi Sunsin and helped them choose resting places. Du Sachung also made friends with Japanese General Kim Chungseon who was naturalized to Joseon Dynasty in 1592 and Woo Seongbeom, Confucian scholar lived at a small village in Daegu.
    He was buried at the foot of Hyeongjebong Mountain where he decided as his nursery beds when he was alive. Momyeongjae, the memorial hall of Du Sachung is located on the south side of the foot of the mountain. Momyeongjae was rebuilt and has been repaired several times since it was destroyed in 1912. His life was historically reviewed and revealed only after 300 years of his life which was around 1907 by Du Byeongha who is 10th generation of Du Sachung while he was studying and arranging the trace of his past. There is not enough information about his ancestors, birth date and his hometown. For preservation of the historical and cultural resources of the region, it is high time to study the trace of his life and shed new light on the contribution to our country. Du Sachung and Momyeongjae have a great historical and cultural meaning as a bridge of understanding between three countries, Korea, China and Japan. In this respect we need to grow these values as our local cultural assets. Finally Du Sachung will also play a big role in attracting Chinese tourists to this region by storytelling marketing and connecting other places of relevance to China.








    (Professor of Catholic University of Daegu / byjin@c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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