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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의 실학적 經世觀 -學問·事功 일치론과 活法·死法論을 중심으로- (King Jeongjo(正祖)'s pragma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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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3.21 최종저작일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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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의 실학적 經世觀 -學問·事功 일치론과 活法·死法論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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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한국실학학회
    · 수록지 정보 : 한국실학연구 / 15호 / 33 ~ 64페이지
    · 저자명 : 박성순

    초록

    정조는 집권 직후부터 규장각을 통해서 개혁정치와 연관된 실학적 업무들을 꾸준히 추진하였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학문·사공 일치론’이라든지 ‘활법·사법론’과 같은 이른바 실학적 경세관의 세부적 개념들을 드러내놓고 대외에 천명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신개념의 천명은 1788년(정조 12)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788년은 정조의 의리탕평이 궤도에 오르는 시점으로 이때를 전기로 하여 왕권강화와 사도세자 신원을 위한 일련의 획기적인 조처들이 단행되었다. 정조의 구체적인 실학적 경세관이 겉으로 표명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의 일이었다는 점은 정조의 왕권강화론과 실학의 정치담론화 과정이 따로 따로 분리되어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1791년부터 전면에 표방되기 시작한 정조의 ‘실학적 경세관’에 대한 세부적인 개념들은 우선 기존의 사림파가 견지하고 있던 전통적인 학문관을 비판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정조는 문사(文辭)보다는 ‘실제의 공덕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과 학문과 사공(事功)은 두 가지 별개의 일이 아닌 하나라는 ‘학문·사공 일치론’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학문적 지향이 ‘실학’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학문·사공 일치론’에 짝하여 정조가 내세운 실학적 경세관의 본질을 잘 보여준 개념은 ‘활법·사법론’이었다. ‘활법·사법론’을 통해서 정조는 여태까지 경학의 본령으로서 권위를 유지해 오던 심성(心性) 이기설(理氣說)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실지 사공, 즉 일용사물과 관련된 학문만이 진짜 경학이라는 새로운 경학관(經學觀)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정도전(鄭道傳)·양성지(梁誠之) 등과 같은 조선 전기의 경세가들에 더해서 조선후기의 개혁정치가였던 김육(金堉)을 정조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선비상으로 주목하였다.
    실학이 진정한 경학이라는 새로운 경학관을 바탕으로 하여 정조는 당시의 사대부들을 ‘경학에 밝지 못한 자들’이라고 공박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언명은 도학의 정통이 이제 사림파 선배 학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군주 자신에게 있다는 군주도통론과 동시에 제시되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요컨대 정조의 새로운 경학관에 담긴 실학적 경세론은 정조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사회, 즉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학문적 목표를 제공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리설을 위주로 하는 기존의 사상계를 동요시킴으로써 ‘군사(君師)’로 자처하는 정조 자신에 대한 절대적 추종을 유도하는 왕권강화책의 사상적 도구로서 기능하였다. ‘경학을 존숭하는 것이 결국 왕을 존숭하는 것’이라는 정조의 새로운 경학관에 의해서 그가 천명한 실학적 경세관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반드시 따라야 될 경학의 본질로서 재해석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하들이 잘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곧 왕에 대한 충성이라는 점을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어초록

    King Jeongjo in the later Joseon Dynasty is easily called "revolutionary monarch". The chart announced on June 1778 contained four revolutionary clauses focused on the economy and politics. These clauses indicate that King Jeongjo was more interested in enhancing the national prosperity and defence than vain academic discussion.
    For the revolutionary politics, King Jeongjo advocated two political rules, "Wuhyun-jwacheok(右賢左戚)" and "Wumunjichi(右文之治)". The former meant that King Jeongjo would employ only upright Confucian literati, not family-in-law, the latter meant that King Jeongjo would treat the Confucian literati cordially and do the politics based on the academic researches. So for it, he established "Gyujang'gak(奎章閣)."
    King Jeong continued promoting the practical tasks related with the revolutionary politics by the "Gyujang'gak(奎章閣)." But until then, King Jeong didn't announce the concrete concepts for his pragmatism, "Hakmun-sagong-ilchiron(學問․事功 一致論)" and "Sabop-hwalbop-non(活法․死法論)". Those new concepts were announced after 1788 because the year was the turning point that King Jeongjo could drive his revolutionary politics openly. Beginning this time, King Jeongjo started several policies for the powerful kingship. So, we can guess that King Jeongjo's pragmatism was related with the policy for strengthening the kingship.
    King Jeongjo attacked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Neo- Confucian literati about Chinese Classics at first. King Jeongjo pointed out that practical things were more important than vain literacy and idealism, and learning and practice were one. King Jeongjo lighted up the pragmatical scholars of the earlier Joseon Dynasty. They have been ignored by Neo-Confucian literati. For example, Jeong Do-jeon, Yang Seong-ji were representative. And King Jeongjo had focused on admiral Yi Soon-sin and pragmatical scholar Kim Yuk. King Jeongjo thought that only practical learning was the core of the Chinese Classics. So he attacked and ignored the Neo-Confucian literati at that time. And he insisted "Gunju-dotong-non(君主道統論)". It meant that now the orthodoxy of Neo-Confucianism belonged to kingship, not the seniors of the Neo-Confucian literati.
    In conclusion, King Jeongjo's pragmatism had functioned as an idealogical tool to induce loyalty of the Neo-Confucian literati by shaking the traditional ideology and concept about the Chinese Classics as notifying his academic goal and utopia which he had been dreaming. In addition to these concepts that Chinese Classics were for pragmatism, King Jeongjo insisted another new concept that the reason why to respect the Chinese Classics was for respecting king. So, we can see that King Jeongjo wanted to definitely explain that his pragmatism was the task for the Neo-Confucian literati to do certainly and following the ideology of the king well was just loyalty to the king. But King Jeongjo's dream had abruptly disappeared with his death in 1880.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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