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국가방위사상과 미래 군수 발전전략
1.1. 서론
미국의 군대가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것은 군사 분야에 있어서 문외한들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인정할 것이다. 세계 최고의 경제력, 과학기술력, 군사비 투자 등을 고려해보면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전투원 개개인의 능력만을 놓고 보면 반드시 미군이 최고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미군을 세계 최고의 군대로 만들었을까?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등 쉼 없이 전쟁을 지속해 왔다. 지금 이 시각에도 미군은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많은 곳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의 경험을 통해서 미군은 대내ㆍ외적인 정치, 경제, 사회, 과학기술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전쟁을 통해서 체득된 교훈을 전략과 정책으로 빠르게 전환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군사적 인프라 구축 이외에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매우 명확한 국가방위사상이다. 얼마 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전쟁 휴전일인 7월 27일 백악관에 조기를 게양하고 각 정부기관은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독자적인 행사를 주관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국가안보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의 미국의 번영과 안전은 국가를 위해서 희생한 이름 없는 영웅들에 의해서 담보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군에 대한 존경심과 국가적인 배려는 당연하다는 사상이 미국 정책과 사상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군대를 위해서 어떤 지원을 해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군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의 유명 대학의 교수들 논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인 정찰-타격 복합체(RSC ; Reconnaissance-Strike Complex), 네트워크 중심전(NCW ; Network Centric Warfare), 비선형 스와밍전(Non-Linear Swarming Warfare) 등의 개념은 군에서 먼저 제시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전략과 정책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는 민간 연구기관이나 대학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의 강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의 효율적인 사용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군사력의 효율적인 사용은 국가방위사상을 기반으로 한 군사력 건설에서 효과적인 전투력 투사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리고 군사력의 효율적인 사용의 중심에 군수(軍需; Military Logistics)가 자리 잡고 있다. 군수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아서 그 범위는 공간적으로는 최전방에서부터 최후방까지, 시간적으로는 군사력 건설을 위한 준비에서부터 전투까지 무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역사 속의 주요 전사(戰史)들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1.2. 국가방위사상과 미래 군수 발전전략
1.2.1. 국가방위사상
1.2.1.1. 국가방위사상의 개념
국가방위사상의 개념은 개인이든 국가든 그 집단이 대집단이든 소집단이든 간에 사람으로 이루어진 모든 조직의 목표가 '생존과 번영'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기준으로 볼 때 생존은 건강이고 번영은 사람답게 사는 것, 즉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며, 국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생존은 국가방위이고 번영은 정치·경제·문화적 삶의 질적 향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존이 보장되지 않았던 국가가 번영했었다."라고 하는 역사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천하가 아무리 태평하다 할지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天下雖安 忘戰必危)는 사실을 전 국민이 확고히 인식하고 이러한 위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철저히 대비하는 호국사상과 국민정신이 곧 국가방위사상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건강이 개개인 본인의 책임이듯, 국가의 존립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국가구성원(국민)모두의 책임이자 의무라는 운명공동체 의식과 국가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백 년 동안 사용되지 않을 수 있지만 준비는 하루라도 게을리 할 수 없다"(兵可百年不用 不可一日無備, 목민심서)는 유비무한의 상무정신이 결합된 국민들의 국가방위사상과 그러한 사상들로 결집된 군대를 비롯한 국가방위체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많은 선각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1.2.1.2. 국가방위사상과 군수의 실증적 사례
국가방위사상과 군수의 실증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외국의 사례로는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의 영광을 영원히 달성하겠다는 명확한 전략사상을 가지고 전 국민적인 지지와 자원의 동원을 이끌어냈다. 전쟁을 수행하기에 앞서 먼저 병참선 확보를 위한 거점을 마련하는 등 군수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칭기즈칸 또한 몽골이 지속적인 경제적·군사적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삶의 터전을 남쪽의 농업지역으로 옮기고 서쪽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장거리 이동 중 군수물자의 부패로 인한 전투력 저하를 막기 위해 육포를 활용하는 등 군수지원에 주목했다.
우리나라의 사례로는 고구려와 이순신 장군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군량을 준비하는 등 국가방위사상이 투철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에 당당하게 맞서며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현지 부족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화해 전략을 병행하여 군수지원을 이끌어냈다. 이순신 장군 또한 전쟁이 임박했음을 미리 예측하고 거북선, 화포 등을 준비하는 등 전쟁에 대비했다. 일본군의 병참선을 차단하여 전쟁 지속력을 저하시키는 등 군수지원에 주력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국가방위사상이 강한 나라들은 찬란한 문명을 이어왔다. 반면 국가방위사상이 약화되어 군대가 해산되고 국권이 침탈당한 우리나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방위사상의 확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는 현대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리로, 국방건설과 운용의 기초를 제공하는 군수 분야에서 국가방위사상을 반영한 전략과 비전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1.2.2. 전사를 통해 본 군수지원
1.2.2.1. 나폴레옹과 독일군의 러시아 정벌 실패
나폴레옹과 독일군의 러시아 정벌 실패는 국가방위사상과 군수지원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폴레옹은 당시 유럽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던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정벌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군대는 후퇴를 거듭하면서 프랑스 군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와 식량을 태워버리거나 함께 가져가 현지 군수조달을 근간으로 하는 프랑스의 군사전략이 성공할 수 없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에 까지 입성하는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는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독일군도 거의 비슷한 실패를 경험했다. 적절한 군수지원에 대한 전략이나 적의 군사전략에 대한 명확한 파악 없이 시작하고 수행되는 전쟁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가방위사상이 약했던 나폴레옹과 독일군의 경우, 전략적 차원에서의 군수지원 계획 부재로 인해 결국 러시아 전역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국가방위사상을 토대로 한 명확한 군수지원 전략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강력한 군대라도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1.2.2.2. 제1ㆍ2차 세계대전(대량 보급 전쟁)
제1ㆍ2차 세계대전(대량 보급 전쟁)은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군수지원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은 막대한 양의 병력과 장비, 물자를 동원하여 전쟁을 지원하였다. 당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군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방대한 병력과 장비, 군수 물자의 수송과 보급이 가장 큰 과제로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군수 체계가 더욱 정교해지고 발전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군수지원의 중요성이 증명되었다. 특히 미국은 막대한 자금과 산업력을 동원하여 전쟁물자를 대량생산하고 이를 신속하게 전선에 보급하였다. 이에 힘입어 연합국은 압도적인 화력과 기동력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독일군은 열악한 군수지원 체계로 인해 전선에서 고전하다가 결국 패배하였다. 이처럼 2차 세계대전은 대량 보급 전쟁이라 불릴 만큼 군수지원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 되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군수지원 체계는 양적, 질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물자의 대량 생산과 신속한 보급, 효율적인 수송 등 군수 분야의 혁신을 통해 전쟁의 지속가능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이후 세대의 군수체계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2.2.3. 6ㆍ25전쟁
6·25전쟁은 한국 군수지원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전쟁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개전 초기부터 열악한 군수 상황에 직면했다. 한반도 전역에 걸쳐 열악한 보급 수송 체계와 시설, 그리고 부족한 군수 자원으로 인해 군수지원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한강선 철수 시 보유하고 있던 보급품마저 방치하게 되어 개전 3일 만에 군수지원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후방에 있던 보급품을 전선까지 수송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서울역에서 전선까지의 보급로가 320km에 달하는 등 병력과 장비에 비해 보급로가 과도하게 신장되어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열악한 도로와 철도 시설, 차량 부족 등으로 인해 보급품 수송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처럼 열악한 군수지원 체계로 인해 전투부대는 끊임없이 군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부족한 식량, 탄약, 연료 등 필수 군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인해 전투력 발휘에 큰 제약을 받았다. 특히 중공군 개입 이후 에는 대규모 공세에 따른 군수 지원의 어려움으로 전선이 후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군수지원의 실패가 결국 전쟁의 패배로 이어지는 교훈을 남긴 6·25전쟁의 경험은 이후 한국군의 군수 체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계기로 한국군은 병력 및 장비 증강뿐만 아니라 군수지원 능력 향상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현재 한국군의 우수한 군수지원 능력은 6·25전쟁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2.2.4. 걸프전쟁
걸프전쟁은 1990년 8월 2일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다국적군은 1991년 1월 17일부터 공중 폭격으로 전쟁을 개시하였고, 2월 24일 대규모 지상군 공격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 전쟁은 정보ㆍ감시ㆍ정찰 능력과 정밀타격 능력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먼저, 다국적군의 군수지원 체계는 매우 효율적이었다. 미 중부군사령부에 72명의 군수 전문가들을 배치하여 우발 상황에 대비한 지원팀을 구성하였고, 전투부대와 군수부대를 C4ISR로 연결하여 실시간으로 작전상황과 보급 상황을 공유하였다. 이를 통해 작전부대의 부족한 전투장비와 물자를 신속히 보급할 수 있었다.
또한 다국적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