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여운형"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여운형의 생애와 독립운동
1.1. 여운형의 성장 배경
1.2. 독립운동 초기 활동
1.3. 중국 망명 기간의 활동
1.4. 국내 복귀 후의 활동
2. 해방 정국과 여운형의 역할
2.1.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설립과 운영
2.2.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와 좌우합작 운동
2.3. 좌익세력과의 갈등과 근로인민당 창당
3. 여운형의 이념과 정치적 행보
3.1.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
3.2. 좌우합작론과 통일 민족국가 건설 추구
3.3. 정치세력들과의 관계 변화
4. 여운형의 암살과 그 영향
5. 참고문헌
5.1. 이정식, 《여운형》, 서울대학교출판사, 2008.
5.2. 이기형,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2004.
5.3. 김삼웅, 《몽양 여운형 평전》, 채륜, 2015.
5.4. 박병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5.5. 최용범,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2008.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여운형의 생애와 독립운동
1.1. 여운형의 성장 배경
여운형은 1886년 5월 19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랜 역사를 지닌 양반 집안이었다. 조선 왕조 말기에 태어난 여운형은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과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몰락의 현장 속에서 성장하였다.
여운형의 선조들은 조선시대부터 명망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의 11대 조부 여우길은 임진왜란 직후 일본에 수호사로 다녀온 인물이었고,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여성제가 그의 선조였다. 이처럼 여운형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양반 가문의 자손이었다.
여운형의 부친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모친 이씨는 상당히 진취적이고 사리 분별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성향은 여운형의 성격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상반된 성향을 경험하면서 여운형은 참을성을 익히게 되었다.
또한 여운형의 조부는 중국과 조선의 근대사에 대한 지식을 전수해주며 어린 여운형에게 장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품게 하였다. 이처럼 여운형의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가문이었지만, 조선의 위기와 몰락의 와중에서 변화와 개혁의 과정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여운형으로 하여금 조국의 독립과 민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2. 독립운동 초기 활동
여운형의 독립운동 초기 활동은 다음과 같다.
1918년 8월 여운형은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몽고에 망명중이던 김규식을 초청하여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이를 통해 조선 독립에 대한 염원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국내의 기독교계 지도자 이승훈 등에게도 소식을 전하여 3·1 운동 발발의 동력이 되었다.
또한 김구, 신채호 등도 신한청년당에 뜻을 같이하면서 이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추진체가 되었다. 여운형은 이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외무부 차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에는 일본으로부터 국빈 초청을 받았다. 일본은 3·1 운동의 여파로 정국을 수습하고자 회유할 만한 인물들을 포섭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수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동경에 방문하여 조선의 독립이 세계적 대세이자 아시아 평화에 불가결한 요건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처럼 여운형은 초기 독립운동 단계에서 신한청년당 조직, 임시정부 활동, 그리고 일본 방문 등을 통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3. 중국 망명 기간의 활동
여운형은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8월에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신한청년당은 당시 몽고에 망명 중이던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조선 독립에 대한 염원을 만방에 알리는데 기여하였다. 이를 통해 3.1운동을 촉발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신한청년당에는 김구, 신채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뜻을 같이 하였고,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토대가 되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외무부 차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일본으로부터 국빈 초청을 받았다. 여운형은 일본 정재계와 군부 인사들 앞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단호히 주장하여 일본을 놀라게 하였다. 이어서 1921년 말부터 1922년 초까지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문하여 레닌, 트로츠키 등을 만나 평등의 사상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여운형은 중국혁명에도 뜻을 같이하였는데,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 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운형은 당시 중국과 소련 등 다양한 진영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오로지 조선의 해방을 목표로 한 것으로, 그는 필요에 따라 어느 진영과도 협력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4. 국내 복귀 후의 활동
여운형은 1932년 7월 대전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른 끝에 출소되었다. 이후 그는 한반도 내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하였다.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 한반도에 보다 강력한 동화(同化, 황국신민화정책, 민족말살정책)정책을 꾀하며 전쟁을 확대하여 갔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가장 암울한 상황일 수 있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한다면 동시에 일본의 패망을 기대하는 희망적인 시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여운형은 국내에서의 활동을 도모한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의 지식사회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이미 세계대전을 전망하는 분위기 아래, 미-일전쟁이냐 혹은 소-일전쟁이냐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상황이기도 하였다.
여운형은 1933년 2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국내에 머물기로 함에 따라 합법활동과 비합법활동의 경계를 넘나들었는데, 조선중앙일보사의 본사와 지부에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들을 배치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또한 강연과 결혼주례, 신문과 잡지 기고, 체육활동 등을 통해 대중정치가로서의 입지도 넓혀갔다.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이에 협력한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했으나, 노동자·농민·소자본가·학생 등에게는 용기와 격려를 아낌없이 쏟았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수재나 화재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피해자들을 돕고 위로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1933년 5월부터 1938년 7월까지 조선체육회 이사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건전한 정신이 건전한 신체에서 깃든다는 평소 지론 아래 조선 청년들을 단련시켜 독립 및 건국 준비의 토대로 삼고자 한 것이다. 특히 그는 '조선 풀-마라톤대회'의 대회위원장을 맡기도 하였고, 손기정에게 한반도의 긍지를 당부하며 1935년 베를린 올림픽 참가를 독려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손기정이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하며 우승하자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 보도를 통해 손기정 가슴에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신문은 정간되었고, 다수가 구금되었으며 끝내 1937년 11월 폐간되었다. 여운형은 "붓대가 꺾어질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할 것이며 그놈들에게 주의...
참고 자료
이정식 저, 《여운형》, 서울대학교출판사, 2008.
이기형 저,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2004.
김삼웅 저, 《몽양 여운형 평전》, 채륜, 2015.
박병엽 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최용범 지음,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