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근대사감춰진이야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신채호 재평가
1.1. 신채호의 등장
1.2. 신채호의 활동
1.2.1. 독립협회 참여
1.2.2. 신민회와 망명
1.2.3. 언론 활동과 임시정부
1.2.4. 의열단 선언
1.2.5. 무정부주의 운동
1.3. 신채호의 최후
1.4. 신채호의 역사 연구
1.4.1. 독사신론
1.4.2. 조선상고사
1.5. 신채호에 대한 평가
1.5.1. 부정적인 평가
1.5.2. 긍정적인 평가
2. 흥선대원군 재평가
2.1.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국내 상황
2.1.1. 정치적 상황
2.1.2. 사상적 상황
2.1.3. 경제적 상황
2.2.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국외 상황
2.3. 흥선대원군의 내정개혁
2.4.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치
2.5. 흥선대원군에 관한 기존의 평가
3.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신채호 재평가
1.1. 신채호의 등장
신채호는 호는 단재로,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골에서 태어났다. 신채호의 할아버지가 그에게 한학을 가르쳤으며, 10세 때 사서삼경을 읽어 신동으로 알려졌다. 18세가 되자 할아버지의 소개로 신기선의 집에 가게 된다. 신채호는 그곳에서 장서를 읽었고 신기선의 마음에 들게 된다. 1898년에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해 관장의 총애를 받는다. 당시 이름 높은 유학자이자 성균관 교수였던 이남규의 아래에서 배우며 김연성 ·변영만 ·이장식 ·유인식 등과 교류했다. 성균관에 입학하고 얼마 뒤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성균관으로 만민공동회를 이끌어 갈 인재를 구한다는 초대장이 왔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만민 공동회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채호는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서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1901년 22살의 신채호는 동지들과 함께 문동학원을 세워 학생들에게 개화사상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을 펼쳤다. 1905년에는 성균관 박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박사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 무렵은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박사에 오르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겨 박사 자리를 내려놓는다.
1.2. 신채호의 활동
1.2.1. 독립협회 참여
1905년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신채호는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된다. 을사늑약이 발표된 후 《황성신문》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글을 실었다. 그로 인해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대한매일신보》에서 활동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 베델이 만든 신문이라 일제의 검열을 피해갔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대한매일신보』에 을사늑약과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글을 계속 썼다. 신채호는 1910년에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을 발표했다.《대한매일신보》에〈일본의 삼대충노>, 〈이십세기 신국민〉등의 글과〈독사신론>,
1.2.2. 신민회와 망명
신채호는 독립협회 활동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글을 실었으나,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대한매일신보》에서 활동하게 된다.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 베델이 만든 신문으로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신채호는 이 신문의 주필이 되어 을사늑약과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1910년 8월 일본의 한반도 강점이 임박하자, 신채호는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는 비밀리에 활동하며 국내에서 군사력 양성과 자금 모금 활동을 펼치는 한편, 해외에 독립군 양성기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신채호는 1911년 신민회 명의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 시도하다가 실패하였고, 이에 일제는 신민회 간부들에 대한 검거를 단행하였다. 신채호는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망명 이후 신채호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자로 변모하였다. 그는 망명지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여 일제 타도와 조선 민중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였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내 지식인들이 탄압받는 현실을 비판하며, 신문 《대한민보》와 잡지 《소년》 등을 발간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2.3. 언론 활동과 임시정부
신채호는 1905년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을사늑약이 발표된 후 《황성신문》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글을 실었다.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대한매일신보》에서 활동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 베델이 만든 신문이라 일제의 검열을 피해갈 수 있었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대한매일신보》에 을사늑약과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글을 계속 썼다. 신채호는 1910년에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우리나라 역사 관계 사론을 발표했다."
1.2.4. 의열단 선언
신채호는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을사늑약과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글을 계속 실었다. 나아가 1910년에는 인천에서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열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의열단 선언"에서 신채호는 "조선을 완전히 독립시키고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자"면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는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것으로, 신채호가 평화로운 계몽운동에서 벗어나 무력으로 조국 광복을 이루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신채호는 의열단을 통해 일제에 대한 테러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는 그의 혁명적 민족주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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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단재 신채호의 생애와 사상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iaptng&logNo=15004708981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독사신론 [네이버 지식백과]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25294&cid=40942&categoryId=33371
신채호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30266&cid=42140&categoryId=42140
신채호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B1%84%ED%98%B8
신채호 비판(역사가로서)
https://blog.naver.com/photonwave/220274294057
[우리역사넷] 신채호, 우리의 역사로 일깨우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eh/view.do?levelId=eh_n0790_0010
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민족운동과 역사연구, 충청문화연구 제5집, 충청문화연구, 2010.12, 1-43
조선상고사 [네이버 지식백과]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4491&cid=40942&categoryId=3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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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채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432
중도일보, [문화人칼럼] 단재 신채호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서
https://www.joongdo.co.kr/web/view.php?key=*************5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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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n.d, 국사편찬위원회-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https://sillok.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연갑수, 2000, “대원군과 서양 - 대원군은 쇄국론자였는가 -”, 역사비평 2000년 봄호(통권 50호), 105 - 149 (45page)
도서명 :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저 자 : 김진명 저
출판사 : 새움
출판일 : 2017년 0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