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주원장의 독재 체제 구축"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명조의 건국과 황제 전제권의 확립
1.1. 명의 전제 정치
1.2. 명왕조의 창건
1.3. 독재 체제의 확립
1.4. 황제 지배체제
1.5. 명의 대외관계
1.6. 황자의 분봉
1.7. 태조 주원장의 죽음
2. 명조의 통치체제와 정치
2.1. 명조 통치체제의 성립
2.1.1. 태조의 전제권 강화
2.1.2. 영락제의 전제권 확립
2.2. 황제권의 양론: 내각과 환관
2.2.1. 내각제도의 발전
2.2.2. 환관의 정치개입
2.2.3. 수보 장거정의 전권정치
2.3. 전제적 중앙집권화에 대한 신사의 대응
2.3.1. 동림운동
2.3.2. 복사운동
3.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명조의 건국과 황제 전제권의 확립
1.1. 명의 전제 정치
명의 전제 정치는 중화제국의 질서가 완성된 마지막 왕조인 명과 청대의 특징을 보여준다. 약 300년간 17명의 황제들이 통치했던 이 시기는 황제 지배체제의 완성단계로 볼 수 있다.
17명의 명대 황제들의 통치는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홍무제에 의해 건국되고 통합된 초창기, (2) 영락제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정력적으로 건설되고 확장된 시기, (3) 제국의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하기 시작한 15세기 중엽 이후, (4) 제국의 힘이 국내외에서 점차 쇠퇴한 시기, (5) 15세기 후반 개혁기와 17세기 초 재난이 격화되어 마침내 붕괴되었던 시기이다.
이처럼 명대 황제들의 통치기간을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명 왕조가 초기 건국 이후 발전과 쇠퇴를 거치며 완성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특히 명 태조 주원장과 영락제에 의해 확립된 황제의 전제권은 청대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는 진한제국 이후 청말까지 2천년 이상 유지된 정치체제로서 시대변화에 따라 변화·발전되어 왔다.
그 변화의 주된 추세는 황제권의 절대화이었다. 송대를 귀족사회 몰락 이후 사대부 관료를 기반으로 황제권이 강화된 시기라고 한다면, 명대는 황제권의 절대화가 이루어진 또 다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명 태조는 원조의 분권적 특성을 일소하고 황제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정치체제를 수립하였다. 황제권의 전제성은 역대 시대에 나타났지만, 명조의 경우 제도적 장치를 통해 보장해 놓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1.2. 명왕조의 창건
말기의 원조 몽고 지배의 쇠퇴는 황실 안에서 이루어진 동족상잔의 경쟁에 의해 촉진되었다. 1333년 이후 15년 동안 북중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던 기근은 황하의 극심한 범람에 의해 절정에 달하였다. 홍수와 기근은 곡물창고를 고갈시켰다. 1340년대에는 거의 모든 지방에서 반란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1351~1353년에는 몇몇 주요한 반란 지도자들이 출현하였으며, 그들 가운데서 누가 천명을 계승할 최적임자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전형적인 왕조 교체기적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이는 송대 황제들의 후손이라고 칭하였고, 어떤 이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彌勒佛)의 내림을 예언함으로써 종교적 지지를 호소하였으며, 어떤 이는 비밀 결사의 도움을 받았다. 비밀 결사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백련교(白蓮敎)였다. 천태종(天台宗)의 한 분파였던 백련교의 직접적 기원은 12세기의 전반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배 왕조에 저항하였던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이 결사 조직도 살아 남기 위하여 비밀스러운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원장의 흥기 반란을 일으킨 중국인 가운데 최후의 승리를 거둔 인물은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었으니, 그는 중국 역사상 한의 고조와 함께 평민출신으로서 황제가 된 보기 드문 영걸이다. 1368년 몽골을 몰아내고 명 제국을 세운 주원장은 역대 어느 왕조의 건국자보다도 희한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일찍이 수·당·송 제국을 세운 양견, 이연, 조광윤은 모두 중원 북방의 유력한 무장 출신이었다. 그리고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시황제는 전국시대 제후라는 당당한 신분이었다. 이들은 제각기 내세울 만한 가문과 배경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한 고조 유방도 이들에 비해서는 한참 떨어지는 신분이지만 변방의 하급관리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보다 한참 못한 걸식승 출신이다. 주원장은 백련교의 군 조직인 홍건군에 자원 입대하였다. 곽자흥(郭子興 ?~1355) 휘하의 병졸이 되어 곧 두각을 나타낸 그는 즉시 십부장(十夫長)이란 하급장교에 임명되었으며 얼마되지 않아 자신의 부대를 소유할 정도로 성공했다.
원군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희생을 치른 곽자흥군은 조직의 재편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때 주원장은 급거 향리에 돌아가 동향의 청년들을 모은 다음 700여명의 부대를 편성했던 것이다. 이 군단이야말로 훗날 명 제국 건설의 중핵이 된다. 특히 이 가운데 서달(徐達 1332~ 1385)·탕화(湯和)등 24인은 주원장의 수족과 같이 움직이며 창업의 고초를 견뎌낸 개국공신들이다. 주원장은 연이어 무공을 세우면서 난징을 중심으로 강남의 동부 일대를 장악하여 홍건군의 대표자가 된다. 그러나 그가 한 단계 비약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근거지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풍부한 곡창지대의 중심이자 강남개발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1356년 3월, 격전 끝에 난징을 함락시킨 다음 그는 인민생활의 안정, 인재의 예우등을 위시한 정책을 펴며 민심을 수렴함과 함께 본격적으로 근거지 경영에 착수했다. 그러나 근거지 체제의 확립과 함께 더욱 중요한 변화가 그 자신에게 나타났다. 홍건군 총수라는 입장으로부터 중국 지배자로의 변신이 그것이다. 난징점령을 전후하여 그의 휘하에는 다수의 학자·지식인들이 참여했다. 그 가운데도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인물로서 유기(劉基)·송렴(宋濂)의 두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주원장은 이 두 사람의 주자학자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아 마침내 백련교를 버리고 전통적인 유교주의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남경점령 후 그는 명실공히 일반 민중이 아니라 지배자의 입장에 선 존재로서의 발걸음을 내딛어 갔다.
그후 1368년(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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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화론 수업에서 강의한것을 정리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