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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조선 후기 미술사
조선 후기 미술사는 약 1700년에서 1850년까지 한국의 문화와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였다. 조선 초기를 민족문화와 미술의 성숙기라고 본다면, 조선 후기는 부흥기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기존의 부당한 사회적 여건이나 정치제도의 개혁을 꾀하고 신분제도의 개선을 주장하며 실증적 태도를 취했던 실학이 발달했다. 이는 정치와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에 걸쳐 큰 의의를 지녔다.
회화 분야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첫째 중기 이래 유행했던 절파의 화풍이 쇠퇴하고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했다. 둘째, 남종화에 기반을 두고 일어난 진경산수화가 대두했다. 셋째, 풍속화가 풍미했으며 넷째, 서양화법이 유입되었고 다섯째, 신선도가 유행했다.
후기 화단에는 삼재(겸재 정선, 공재 윤두서, 현재 심사정)로 불리는 뛰어난 화가들이 있었으며, 풍속화의 대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배출되었다. 또한 강세황, 이인상, 윤제홍, 신위 등의 문인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자신의 여행 체험을 통해 독자적인 진경산수화 양식을 확립했다. 정선 이전에도 실제 풍경을 담은 그림이 있었지만, 정선은 중국의 관념화된 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삼고 조선의 인물을 그려 넣는 등 독자적인 양식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처럼 조선 후기 회화는 남종화풍의 본격적인 유행과 함께 진경산수화의 등장, 풍속화의 발달 등 다양한 변화를 보였으며, 정선을 중심으로 한 진경산수화가 크게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1.2. 진경산수화와 정선의 출현
조선 후기에는 중기 이래 유행하던 절파의 화풍이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남종화에 기반을 두고 일어난 진경산수화가 대두하였다. 진경산수화는 실제의 경치를 그린 그림을 뜻하지만, 거기에는 세속적인 평범한 경치가 아닌 신선이 사는 깨끗한 곳을 그림이라는 의미가 살아 있어 실경산수화와 차원을 달리한다.
정선(1676~1759)은 우리나라 산천을 여행하고 그 여행 체험을 통해 산수화에 있어서 진경산수화라는 독자적인 자기 화풍을 이룩한 화가이다. 정선 이전에도 고려시대의 화가 이녕이 그린 예성강도와 같은 실제 풍경을 담은 그림이 있었으나, 정선에 이르러 진경산수화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전의 전통이 실경산수에 머물렀다면 정선은 진경의 진정한 의미를 담으면서 우리나라의 산천을 독자적인 민족 형식으로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관념화된 중국의 산수화를 과감히 버리고 우리의 산천을 소재로 삼고 그 속에 조선의 인물을 그려 넣었으며, 우리나라 산천에 알맞은 기법으로 그려 독자적인 양식을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작품들은 30대~50대 전반까지 정선화풍의 형성기, 50대 후반~60대 후반 정선화풍의 완성기, 70대~80대 완숙기 등 3기로 구분된다. 1734년에 그린 강물이 흘러내리는 풍경도나 1739년에 그린 서울과 한강일대의 명승도 등 60대의 작품들에서는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실경 형상을 잘 소화하였으며, 부감법의 원형구도, 대각선이나 사선의 화면구성, 수직준, 부벽준을 변형시킨 적묵법의 바위표현, 편필 직필의 'J'자형 소나무묘법 등 정선화풍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정선의 작품은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완숙해지며, 수묵의 구사나 필력은 사실적 태도에서 벗어나 더욱 활달해져 현대적 감각을 보여준다.
정선은 조선 후기 회화사상 가장 뛰어난 화가로 평가받으며, 그의 진경산수화는 명·청대의 탈속 심미적 신문인주의의 국제적 조류 위에서 우리나라의 산천을 독자적인 민족 형식으로 완성시킨 당시 동아시아 세계 최고의 창작물이라 할 수 있다.
2. 정선의 생애와 작품연구
2.1. 정선의 생애
정선의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이며, 가세가 몰락한 한미한 양반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다. 당시 노론의 거두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집(金昌集) 형제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올라 양천 현감(楊川縣監) 등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는 또한 예술을 사랑하는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도 긴밀한 교유를 하였는데, 이들과의 사귐은 그의 회화 세계를 넓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그리는 진경산수를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필묵법으로 화면에 담아내었다. 강한 직선의 수직준법, 대담한 산형의 변형, 굵은 미점 등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연미의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그는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고,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2.2.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선은 남종화 계통의 화풍을 익혀 자신만의 스타일로 발전시켰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실경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를 선보여 큰 영향을 미쳤다.
정선은 1676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였다. 가세가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관료로 추천을 받았다. 당시 노론의 거두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 형제의 도움으로 양천 현감 등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다.
정선은 남종화 계통의 화풍을 열심히 익히고 자신만의 독특한 필묵법으로 진경산수화를 그려냈다. 강한 직선의 수직준법, 대담한 산형의 변형, 굵은 미점 등을 적절히 사용하여 자연미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실제로 여행을 통해 직접 경험한 우리나라의 산천을 화제로 삼아 진경산수화 작품을 다수 남겼는데, 이는 전통적인 관념화된 중국 산수화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양식이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30대~50대 전반의 초기에는 화풍이 형성되는 시기로, 대표작인 「금강산 화첩」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 실경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편이었다. 50대 후반~60대 후반의 중기에는 정선 화풍의 완성기로, 「인왕산도」, 「서호낙조」 등 대표작들이 등장했다. 70대~80대의 말기에는 형식화된 면모도 있지만 세련미의 절정을 이루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우리나라 실경의 특성을 잘 표현해냈다. 습윤한 피마준법, 미점과 태점, 수직준과 부벽준 등 독특한 기법을 구사하여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냈다. 또한 부감법의 원형구도, 대각선이나 사선의 화면구성 등 정선만의 개성적인 요소들이 돋보인다.
정선은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특히 진경산수화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중국 산수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자연을 사실적이면서도 격조 높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그의 화풍은 후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진경산수화 전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