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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원인
1.1.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체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승전국들에게는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으나, 패전국 독일에게는 가혹한 처벌에 다름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독일에게 전가함과 동시에 막대한 배상금 지불, 영토 및 식민지 상실, 군사력 축소 등 독일에게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였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극심한 국력 손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건에 심한 반발을 보였다. 베르사유 조약은 전쟁 책임을 묻는 것 외에도 독일의 영토와 식민지를 대폭 박탈하고 천문학적인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였다. 특히 당시 독일 국민들의 자존심과 민족주의 감정을 크게 자극한 것이 바로 알자스-로렌 지방의 프랑스 귀속과 폴란드에 대한 영토 할양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는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강력한 반발과 더불어 복수심이 고조되었다.
더욱이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사력을 크게 제한하여 독일의 재무장과 국력 회복을 막았다. 조약은 독일군 규모를 10만 명 이하로 제한하고 중화기 사용을 금지하는 등 독일의 군사력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이는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원인 중 하나였던 군사력 약세를 더욱 심화시켜, 향후 독일이 군사적으로 부활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다.
이처럼 베르사유 체제는 독일의 민족주의와 복수심을 자극하고, 군사력 약화를 통해 향후 독일의 재부상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는 독일로 하여금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강력한 거부감을 가지게 하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2. 미국의 경제 대공황
미국의 경제 대공황은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약 10년 간 지속된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였다. 1929년 10월 주식시장이 대폭락한 "검은 목요일" 사건은 이 위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미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1920년대 후반, 철강, 건축, 자동차, 철도운송 등 주요 산업들의 가격이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투기가 만연하였다. 주식을 매입하기 위해 대출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거품 경제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거품이 1929년 10월 주식시장 폭락으로 인해 사라지면서 경제 전반의 붕괴로 이어졌다.
대공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과잉생산과 과잉투자, 그리고 투기 경제였다. 미국 농업 부문의 생산량은 호황기로 인해 크게 늘었지만, 다른 국가들의 생산량도 증가하면서 밀 가격이 폭락하여 농민들의 타격이 컸다. 산업계 역시 과잉 투자로 인해 공급이 수요를 크게 초과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기업들이 자금 회수에 나서면서 자금 경색이 발생했다.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 경제는 25%의 실업률을 기록하며 궁핍에 빠졌다. 유럽 국가들 역시 큰 타격을 받았는데, 특히 독일은 33%의 실업률을 보이며 경제적 혼란에 빠졌다. 이는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결국 미국의 대공황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경제 침체와 혼란을 야기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3. 이탈리아의 파시즘 성장
당시 대내적으로 독일의 협상국이었던 이탈리아는 런던 조약에서 체결한 내용에 해당되는 영토를 지급받지 못하자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심화되었다. 그와 더불어서 미국의 경제 대공황과 실업률의 증가로 국가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국가 대외적으로는 불세비키에 의한 소련의 창궐로 공산주의 세력이 성장하고 있으며 소련의 성장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 사이에서 반공동맹이 형성되는 등의 움직임이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시즘을 주도한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하여 파시스트 정당이 설립되었으며 쿠테타를 활용하여 정권을 잡고 파시스트 국가를 창궐하였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당시 이탈리아가 겪고 있던 대내적, 대외적인 혼란과 부정부패, 경제적 손실 등의 문제점들을 급진적이고 강압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압과 폭력을 사용했다. 그를 중심으로 민주주의보다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권위주의, 반공주의 사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