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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현부인상점과 이일정 여사
1.1. 이일정 여사와 이준 열사
이일정 여사는 한말의 정치 운동가였던 이준 열사의 아내이다. 이준 열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로 밀사로 파견되었다. 당시는 국세가 크게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준 열사는 1859년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주만복의 도움을 받아 그의 딸과 결혼했지만, 이후 기록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상경하여 공직에 머물기도 하였으나 주로 개화파의 인사로서 활동했다. 1893년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이일정 여사와 김병시의 중매로 결혼했다. 이들은 동지적 부부관계로, 군국사와 사회운동 등에 있어 의견을 나누며 공동 활동하였다.
1904년 12월 공진회 회장이었던 이준이 항일운동을 하다 구속되자, 이일정은 살던 집을 팔고 안현동에 상점을 열었다. 이는 양반이 상업에 뛰어드는 것이 어려웠던 당시에 큰 사건이었다. 상점은 비누, 머릿기름, 분, 바늘과 실 등 생활용품을 취급하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여성의 상업 지속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 속에서도 남편의 지지로 영업은 2년간 유지되었다. 이일정은 상점 수익금의 일부를 일본 유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1907년 이준 열사가 순국하자, 이일정은 광동학교 교감 일을 그만두고 대외 활동도 줄였다. 이후 남편의 유해를 찾기 위해 러시아 하얼빈까지 갔지만 빈손으로 돌아왔고, "해는 장사에 머물고 추색은 깊은데 어디 가서 낭군을 조상해야 하는가"라는 시를 남겼다.
1.2. 이름을 건 상점을 개업하다, 안현부인상점(일정상회)
이일정은 1905년 2월에 '일정상회'를 개점하여 살림살이에 필요한 일용 잡화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대는 양반이 상업에 뛰어드는 것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특히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여성을 천한 신분으로 여기던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가인 이준의 아내가 개점한 일은 큰 사건이었다. 상점에서는 비누, 머릿기름, 분, 바늘과 실, 실패, 단추 등 집집마다 방물장수들이 팔았던 생활필수품과 살림살이를 주로 취급했다. 상점은 전면을 유리로 장식하여 당시로서 현대적인 모습을 갖췄으며 제품의 값도 적당하고 주인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여성이 상업을 지속하는 것에 나쁜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다행히 남편의 지지를 받아 영업은 2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일정은 상점 수익금 일부를 일본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1907년 2월에 일진회로부터 학비 조달을 받지 못해 곤경에 처한 일본 유학생들이 '단지동맹'으로 공부를 결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들 21명에게 21원을 송금하기도 했다. 이때 장학기금 마련을 위해 대한매일신보에 의연금 모집 글을 기고했다. 하지만 상점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헤이그 특사 실패로 이준 열사가 순국(1907년 4월)했기 때문이다.
1.3. 여자교육 복권론과 여성교육
이일정은 여자교육회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동회는 "학문과 여공과 부덕을 ...